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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꺼져가는 시야를 비집어 마지막까지 남자의 상을 더듬었다. 길고 긴 악몽은 끝이 났고, 늦게나마 그녀가 바라는 결말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들릴 리 없는 소리가 흐린 정신 속에 새어들어온다. 남자의 목소리는, 아. 금수의 것을 닮은 형태로 귓가를 할퀴는 날카로운 울음이 되어 흐른다. 그 사이에 간간이 섞인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음. 여자를 지독히도 긴 악몽에 밀어 넣은 기계음이었다.

 

 이제 이 꿈은 누구의 악몽이 되는 걸까. 나? 아니면 당신? 여자는 소소한 의문을 띄우며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다시금 남자는 제 곁에 있으리라는 어렴풋한 예감이 떠오른다. 질리도록 눈에 익은 자리에, 질리도록 눈에 익은 표정을 하고, 또다시 붕괴는 시작되리라고.

 

 

 

 -

 

 

 

 단테의 연주가 무너진다. 숨이 막히도록 창백한 드럼의 음색만이 시야를 채웠다. 그라함의 드럼은 난생처음 보는 형태로 절망자의 연주 위를 덮고, 그 위로 슈인의 웃음이 터진다. 단테의 칠흑빛 음색은 흔적도 남지 않은 광경. 나를 지탱하는 다정이 사라진 공간.

 

 눈을 뜬 순간부터 알았다. 찬란한 조명과 수선한 이목이 집중된 무대, 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비추는 화려한 햇볕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 속의 것이었으므로. 이건 그날의 꿈이라고, 지독할 만큼 반복하는 악몽이라고 알려주듯 눈가를 찌르는 빛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 날 이 순간만을 되풀이하는 건 여전히 트라우마처럼 남은 찌꺼기를 털지 못한 탓이리라.

 

 이건 그날의 기억이다. 이미 지나온 순간, 지나온 시간의 잔상이다. 그렇기에 안다. 이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는 무너지고, 라이브 회장은 슈인의 폭탄으로 붕괴한다. 그리고 단테는―

 부서진 회장의 파편으로부터 나를 감싸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내 등을 떠밀고, 포기할 수 없도록 발치를 잡아끄는 저주를 남기고, 다친 곳 하나 없이 빠져나온 나는,

 

 나는, 당신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세상을 살아간다.

 

 몇 번이고 마주한 광경임에도 몸이 굳었다. 악몽은 불규칙적으로 찾아왔고, 몇 번이고 겪은 상황 속에서 나는 언제나 다른 행동을 취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제논의 음색이 머릿속을 파고들기라도 하듯 새하얗게 바랜 머리는 별다른 선택지를 떠올리지 못했으므로.

 모진 기억과 완전히 겹치는 형태로 붉게 물든 단테의 팔에 시선을 주노라면, 그제서야 멍하니 바라고 만다. 꿈에서라도 이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과거는 바꿀 수 없더라도, 꿈에서라도, 내 멋대로의 꿈일 뿐이라도, 제발. 단테가 날 감싸지 않았더라면, 당신 대신 내가 그 자리에 남았더라면.

 

 무의미한 바람을 소리 내어 중얼거린 순간, 처음 듣는 소음이 귓가를 꿰뚫었다. 그것은 회장이 무너지는 소란 속에서도 확실하게 들려왔다. 금속이 부닥치는 불쾌한 노이즈. 꼭 녹슨 기계장치에 억지로 힘을 주어 동작시키는 소리를 닮은.

분명 소음일 뿐인데, 기묘하게도 기계장치의 소리는 누군가가 속삭이는 형태를 닮았더랬다. 어디에서 기어 나오는 소리인지조차 알 수 없었으나 왜인지 주인을 잃은 입술만이 선명한 형체를 그리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뇌라도 당한다면 꼭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은 감각.

 

 기회를 줄게. 네가 바라는 결말을 맞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돌아갈 수 있게.

 단, 부탁은 언제나 ‘제발’ 을 붙일 것. 그럼 힘내.

 

 묘한 제한조건과 형식적인 응원을 귀에 담은 직후,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는 머리 한구석을 찌르듯 급작스레 찾아온 울렁거림에 떠밀려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무너지지 않은 라이브 회장은 폭탄으로 무너질 운명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감이 있다. 기시감을 부르는 감상에 고개를 세차게 꺾었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날을 되뇌는 것조차 두렵게 만든 나의 절망을 확인해야만 했다.

 멀끔하게 빛나는 화려한 잔상과 마냥 즐겁기만 한 소란을 노래하는 관객. 그 사이를 틈틈이 채운 아발론의 익숙한 긴장감. 정말로 그 시간을 다시 시작하는 거라면, 그럼 단테는?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익숙한 눈길이 닿는다는 걸 깨닫는다. 그 방향 그대로 시선을 돌리면, 당신은,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표정을 지은 채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

 

 

 

 벚꽃이 화사하게 핀 무렵의 봄날이다. 딱 이 무렵의 은은한 아름다움 대신 인조적인 번쩍임만이 눈을 찔렀다. 누가 보더라도 돈 꽤나 쏟아부었구나 하고 평가할 법한 거대한 무대는 두말할 것도 없이 크림슨이 마련한 것. 그중 가장 많은 주목이 집중되는 메인 스테이지 위에서, 단테는 나를 바라보며 무너지는 중이었다.

 

 

 “단테……?”

 

 

 때를 놓친 벚꽃이 지듯 너저분하게 사그라드는 음색을, 나는 알고 있다. 단테의 절망을 담은 칠흑의 톤이 숨통마저 조여오는 하얀 멜로디에 파묻히는 시야 역시 안다. 애써 정신을 다잡으면 눈가를 파고드는 핏빛의 노이즈가 너머의 풍경을 일그러트리고 속을 헤집듯 울렁거리는 감각을 피웠다. 풍경과 음색의 경계가 허물어져 눈에 담는 모든 것이 소음으로만 비치는 불쾌한 감각. 이건 분명 카디건의 주머니로부터 시작한 슈인의 장난이다. 도가 지나친 장난은 음색을 덧그리는 눈을 감기고, 타이틀 홀더인 사향 단테에게 패배를 안겨주며, 그 원인인 나를 책망하기에 이른다.

 들리지만 볼 수는 없는, 나 자신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끔찍한 경험. 왜 다시 이 순간을 마주해야 하는지. 떨리는 손을 들어 애써 드럼을 향해 뻗어본들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 작은 몸짓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네가 바라는 결말을 맞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돌아갈 수 있게.

 

 무엇에도 닿지 못한 손끝에 기계음이 속삭인 문장만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회장이 무너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꿈에서라도 이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 때늦은 바람 역시 떠올랐다. 정말 내가 바라는 결말을 맞을 수 있는 기회일까.

하지만 이 순간을 반복한다 한들 뭘 바꿀 수 있어? 연주가 시작하기 전이었더라면, 혹은 연주 도중이기만 했어도. 카디건 주머니에 처박아둔 펜던트를 집어던질 수 있었을 텐데. 단테의 패배를 없던 일로 돌이킬 수 있었을 텐데. 슈인의 장난감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제 무게를 자랑하듯 자리를 차지하는 중이고, 단테의 연주는 채 끝맺지 못하고 멈추었다. 이대로라면 회장이 무너지는 것 역시 피할 수 없으리라. 대체 이 상황에서 뭘 바꿀 수 있어?

 

 슈인의 웃음소리와 그라함의 뒷모습은 데자뷰를 부르며 멀어진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있는 그대로 다시금 접한다는 건 숨조차 버거울 만큼 잔인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날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 펜던트를 지닌 내게 쏟아지는 패배의 무게, 악의가 담긴 웃음과 폭탄이 터지는 소리, 그리고 무력함에 배어 나온 눈물로 번지는 시야. 힘이 풀려 주저앉은 다리까지 모든 게 그대로다. 여기서 나는 뭘 더 할 수 있어?

 

 이 꿈을 반복하며 바꿀 수 있는 건 하나뿐이라고,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자각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바꾸고 싶었던 건 결말뿐이었다고. 결말을 부른 근원이 아니라, 그저 결말을 바꾸고 싶었을 뿐이라고.

 내가 바꾸고 싶었던 결말은, 그래. 지금 눈앞에 펼쳐진 그것이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회장의 파편으로부터 패배의 원인을 구하고, 대신 부상을 입어 언제 올지 모를 재회를 기약하는. 당신이라는 절망을 이 자리에 두고도 멈추지 말라는 저주를 품고 홀로 나아가는 일. 단테가 남긴 온기를 등에 업은 채 다리를 놀리는 일. 이게 그날로부터 정해진, 그리고 내가 바꾸고 싶었던 결말.

 

 부탁은 언제나 ‘제발’ 을 붙일 것. 녹슨 속삭임이 스친다.

 

 

 “다시 시작할래, 듣고 있어? 제발.”

 

 

 누구에게 간청하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바람을 입에 넣고 굴린다. 어쩌면 일말의 기대조차 담기지 않은 말. 그럼에도 내 등을 떠미는 단테의 팔이 흐릿하게 가라앉는다. 꼭 지우개로 문질러 갓 지나간 시간을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번지도록 두는 것처럼. 잘못 그린 선을 지우듯 뭉개는 것처럼.

 

 손톱을 검게 물들인 손을 내리누르던 콘크리트가 공중으로 떠올라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이런 악몽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마지막 파편이 떠오르고 나면 나 역시 다시금 그 끔찍하기 짝이 없는 순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기묘한 불안이 일었다. 그때도 단테의 한쪽 팔이 완전히 파편에 깔린 채였던가?

 

 

 

-

 

 

 

 챙 넓은 모자와 가면에 가린 이죽거리는 웃음도 선글라스 너머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빛도 여전하다. 슈인과 그라함이 보는 와중에 무력해진 나도, 그 때문에 덩달아 연주를 마치지 못한 단테 역시도, 여전하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는 건 필연이다. 그리고 고쳐 써야 하는 건 이 패배가 아니다. 내가 같은 악몽을 되풀이하며 바꿔야 하는 건 마지막 결말뿐, 더한 욕심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으므로.

 이름조차 모를 존재에게 부탁을 하고 같은 시간을 되돌리고. 남은 건 내가 정신을 제대로 차려 단테가 나설 필요조차 없게 바꾸는 일뿐이다.

 

 여전히 질척하게 흘러내려 시야를 가리는 풍경 속에서 단테로 보이는 실루엣을 찾았다. 검고, 검고, 일부는 붉지만 다시금 검으며, 그 틈에 희미하게 비치는 진분홍. 내가 절망으로 품은 음색과 그런 내게만 비추는 당신의 다정이다. 당신의 연주는 꼭 그런 색을 띠고 있어서, 모든 색의 경계가 흐리더라도 알아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절대 놓칠 수 없다. 놓칠 리가 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풀린 다리를 질질 끌어가면서도 단테와의 거리를 좁혔다.

 단테에게 다가가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슈인은 폭탄을 터트리고, 회장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괜찮아. 이번에는 멍하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당신이 날 감싸러 달려들 필요는 없어. 당신은 그저,

 

 그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결말을 맞기를. 걸음이 꼬여 무너지는 발걸음 속에서, 그리 바랐다. 당신이 이런 나를 보지 못했길 바랐다.

 다만 이 꿈은 내 것임에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진분홍의 눈조차도 올곧게 이쪽을 향한 채 멈추었으니까.

 

 콘크리트가 바닥을 내려찍으며 우는 굉음은 귓가를 찢었고, 그 소리와 동시에 단테의 살갗도 찢긴다. 뜨거운 체온에 떠밀린 몸은 아픈 곳 하나 없다. 그럼에도 바닥에 흐드러진 붉은 자욱이 이번에도 같은 결말이라는 걸 강조하듯 피어서. 아. 짤막한 단말마가 어찌 할 새도 없이 튀어나간다. 다시금 주워담을 수 없는 소리를 내던진 채, 여전히 나를 향한 눈을 마주한다. 흔들림 없는 눈에 손을 뻗으려다 그대로 힘을 빼고 팔을 늘어뜨렸다. 단테와 맞닿을 자격은 방금의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으므로.

 

 

 “단테, 나, 는―……”

 “이건 네게 있어 대단한 절망이 아닌가. 그럼, 내가 어떤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을 테지.”

 

 

 간신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끊고 단테의 목소리가 흐른다. 이건 저주의 시작이다. 당신의 부상이라는 절망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도록 일으켜 세우는 문장을 암시하는 말. 당신은 이를 직접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는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되뇌길 바랐다. 몇 번을 거듭해도 지독하게 잔인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절망은 발걸음을 멈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문장은 당신의 입버릇이었으므로. 한때 나를 구원한 문장을, 모를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이 없는 절망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도록 의지를 잃은 몸뚱아리를 억지로 질질 끄는 저주다.

 

 최악의 재앙을 내린 직후, 단테는 내 등을 떠민다. 자신 따위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과 함께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당신의 커다란 손에 비교되는 좁다란 등을 떠밀 터였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그러했다.

 하지만, 그제서야 알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단테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나서야, 채 담지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단테에게 내 등을 떠밀 만한 손은 남지 않았다는걸. 차갑기 짝이 없는 회색의 덩어리에 짓눌린 양팔은 기억과 같지 않다는걸. 이를 드러내며 웃는 단테의 표정이 기억보다 힘겨워 보인다는걸.

 왜? 그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기억이 잘못되었을 리 없다. 그토록 강렬하게 새긴 기억이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되려 제발 잊어달라 울어도 눈물에 젖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던 기억일진대, 어째서.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담지 못한 손길이 떠넘긴 무게에 감겨 버겁던 다리의 감각은 여전히 악몽 속에 눌어붙은 채인데도.

 어쩌면 내가 섣불리 움직인 게 상황을 악화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괜히 나서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내 한 몸 간수하는 걸 목표로 할게. 단테가 나설 필요 없도록 움직이기만 할 테니까.

다시 시작할게, 제발. 다음 시도에는 부디 최적의 결말에 닿기를. 부탁하는 두 음절에 힘을 주고 눈을 감았다. 내게 아무런 온기도 전하지 못하게 된 단테가 소음을 닮은 색으로 녹아 사라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과연, 눈꺼풀이 내려앉은 시야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못했다. 다만 아무런 내용도 담지 못한 단테의 옅은 목소리만이 마지막 울음처럼 스러진다.

 어리석게도, 그 울음조차 나를 향한 격려이길 바랐다. 다음번에는 잘할 수 있으리라고. 당신이 다치지 않는 결말에 닿을 거라고.

 

 

 

-

 

 

 

 제발, 제발, 제발. 몇 번을 게운 단어인지. 웃기지도 않는 부탁의 조건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횟수를 반복해갈수록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온 진심을 토하는 울음이 되어 흐르는 간청이 된 지 오래다.

 몇 번을 반복해도 단테는 나를 위해 같은 결말을 맞았고, 같은 시간을 반복하며 그 고통의 농도는 짙어졌다. 처음에는 팔 하나, 그다음은 양팔, 양 다리…… 묵직한 파편은 너른 등에 정통으로 꽂히기도 했고 때론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으며, 그럼에도 단테는 나를 감싸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결말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입을 여는 것조차 힘겨운 넝마가 되어가면서도 다시 만나자는 말을 반복하면서.

 “제발. 이제 제발 그만하게 해줘.”

 ‘제발’을 반복할수록 상황이 악화된다는 걸 알아챈 순간 그리 바랐고, 슈인과는 다른 방향으로 불쾌한 음이 즉각 머리를 울렸다. 이 꿈은 내가 원하는 결말에 닿을 때 비로소 끝이 난다고 웃었다. 아니, 그건 정말 웃는 소리였을까. 어쩌면 누군가의 비명을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같은 악몽을 반복하는 누군가의, 나와 같은 처지의 메아리가 아니었을까.

 제발이라는 두 음절은 더 이상 바라지 않음에도 입에 담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이야기의 끝과 시작으로 추락했다. 마냥 아무래도 좋을 조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악취미라는 생각만을 선명히 띄울 뿐이었다. 바라지 않는 반복에 억지로 예를 차린 단어를 붙인, 진심이 담기지 않은 기도를 즐기고 있는 누군가가 저주스러웠다.

 온몸이 짓눌려 숨소리조차 희미한 단테를 눈에 담으며 간청한다. 제발, 이번이 마지막 부탁이 될 수 있길. 제발 다음은 없기를. 다음에는 정말로 단테가 죽을 지도 몰라. 아무리 꿈이라도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 그런 비극을 바라고 시작한 악몽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단테가 죽기 전에 끝을 내겠다고 빌었다. 제발이라고 울었다.

 기계장치의 음은 꼭 비웃음을 닮은 형태로 돌아간다. 녹슨 소리는 어쩐지 점차 닳아가는 나와 닮은 것도 같았다.

-

 

 

 여전히 현기증처럼 들러붙는 펜던트의 잔향을 흩뜨리기라도 하듯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헤아리는 걸 포기할 정도로 반복한 시간 속에서 실패한 이유를 떠올린다. 어느 것 하나 온전히 겹치지 못한 바보 같은 이유들이 하나 둘 스쳐갔다. 발이 미끄러져서, 다리가 꼬여서, 기억하는 것보다 파편이 빠르게 떨어져서, 이렇게까지 하는 데도 바뀌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울다 지쳐서, 부은 눈이 둔하게 내려앉아서. 그저, 내가 같은 악몽을 반복했기 때문에.

 

 직전의 단테는 숨이 붙은 것마저 기적인 상태로 끝을 맺었다. 처음에는 한쪽 팔, 그다음은 양팔, 또 그다음은 다리까지. 폭발의 영향은 점점 정도를 더해가고 단테의 표정 역시 점차 웃음을 짓지 못할 정도로 일그러져갔다. 이 흐름이라면, 아마 이번에는 절대로 죽을 것이다.

 

 결국 내 꿈이기 때문일까, 누군가가 일러주기라도 하듯 돌연한 확신이 들어선다. 이번에도 바꾸지 못하면 단테가 죽는다고.

 다시금 되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 절망의 숨이 눈앞에서, 그것도 나를 이유로 끊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번 결말도 바꾸지 못해 단테가 죽어버린다면, 그 순간 나 역시 이 꿈을 놔버릴 생각이었다. 포기하면 어떻게 될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눈앞에서 단테가 스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그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배제할 수 있다면 그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을 뿐. 하지만 거기에 끝이 있다면, 더욱이 그것이 내가 바라지 않은 형태의 끝이라면. 나는 기꺼이 모든 걸 내려놓을 자신이 있었다.

 

 

 “히마와리, 이건……”

 

 “단테의 음을 튜너로서 지키지 못한 내 탓이야. 미안해.”

 

 

 그라함에게 패배해 무너져내린 단테의 구겨진 인상을 곧게 마주하고 지나치게 늦은 감이 있는 사과를 건넨다. 그래, 진작에 사과부터 했어야 했다. 이 날, 이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더라면. 진즉 잘못을 인정하고 금방 털어냈어야 했다고 후회한 기억이 남아 있다. 이토록 늦은 사과는 이제서야 지난 후회를 떠올린 내 탓이었다.

 이건 나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주 오래전 슈인이 펜던트를 건넨 그 순간부터 내게 빌붙은 채 잠복하고 있던 질 나쁜 장난이라고. 결국 그 책임은 오롯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진작에 인정했어야 했다. 멋대로 들러붙은 죄책감이 안쪽으로부터 좀먹어가기 전에, 썩어들어간 자리가 당신을 끌어당기기 전에 이랬어야만 했다고. 내 멋대로 정한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받아들인다.

 

 사향의 타이틀마저 빼앗긴 단테의 진분홍색 눈동자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고 묻는다. 그 눈을 마주한 나는, 그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웃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곧 생길 일만 남았는데 뭐. 잔잔하게 뜬 눈은 슈인에게로 향한다. 긴 천에 휘감긴 팔 끝에는 익숙한 버튼이 들렸다. 버튼 위에 손가락을 얹고 힘을 주면 아마 온몸을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익숙한 비명소리가 울리리라.

 그리고 그 속에 나와 단테의 목소리는 섞이지 않을 터였다.

 

 이제는 숨소리만으로도 쉬이 헤아리는 박자에 맞추어 폭음이 일었다. 둔탁하게 무너지는 소리도, 불규칙하게 잇따르는 외마디도 전부. 익숙한 박자를 타고 터진다. 과연 크림슨이 저지를 법한 일처리 방식이라며 혀를 차는 소리 또한 예상한 그대로의 타이밍에 흘렀다.

 

 

 “더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이야기는 나중이니, 어서―”

 

 

 다급한 당신의 목소리에도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감각이 넉넉하게 내린다. 아니야. 아무리 서둘러도 우리 두 사람은 함께 빠져나갈 수 없다. 뭘 하든 이야기는 쉽게 변하지 않아. 그건 오래도록 반복한 악몽 끝에 간신히 알아차린 작은 진실이었다. 소란한 주변의 광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톤이 느리게 튀어나간다.

 

 

 “이건 전부 내 꿈일 뿐이니까, 나는 이대로 여기 있어도 괜찮아.”

 

 

 어쩌면 이 자리를 지키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고. 그러고 보면 단 한 번도, 꿈속의 단테에게 이 모든 시간은 내 악몽이라고 전한 적이 없다. 내 의지로 한자리에 가만히 있는 걸 택한 적 역시 없다. 그날의 기억을 되뇔 뿐인 악몽이라면 내가 선 자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나를 감싸기 위해 다가올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예측할 수 있는 범위의, 언제나와 같은 이야기.

바보같이 가장 단순한 방법을 놓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다가오는 당신을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나 대신 여기에 남을  일은 없었을 텐데.

 

 

 “――…! ……―…!!”

 

 “제발, 부탁이니까.”

 

 

 이번에야말로 단테가 날 대신하지 않도록 해줘. 내가 바라는 결말을 보게 해줘. 굉음에 묻힌 소리가 닿았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약하게 밀어내는 몸짓에도 단테는 당혹스러운 표정과 함께 밀려났고, 때문에 커다란 손은 내게 닿지 못했고, 그리고.

 

 정말로, 내가 바라는 결말을 맞았다. 바라고 또 바란 끝은 소리 없는 잠이 쏟아지듯 아득한 기분과 함께였다.

 

 애초에 이 역할은 내 몫이었다. 당신은 이 역할을 지독하리만큼 진득하게 앗아가는 사람이었고. 이 고통은 오롯 내게 주어져야 하는 결말이었다. 다만 같은 시간을 반복한 탓에 무게를 더한 고통이 죽음의 형상을 그릴 만큼 불어났을 뿐이다.

당신은 내가 감히 저를 밀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나는 단 한 번도 단테를 거부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순순히 밀려난 걸지도 몰랐다. 이제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만. 길고 긴 악몽은 끝이 났고, 무거워지는 눈꺼풀은 그제서야 단테를 찾았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나를 잃은 당신은 어떤 표정을 할지 도무지 그려지질 않아서.

 

 꺼져가는 시야는 당최 그토록 선명한 진분홍의 시선을 담지 못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발 여럿에만 머물 뿐. 거뭇하게 잃어버린 시각을 대신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가 들려온다. 금수를 닮은 날카로운 울음과, 지독하리만큼 거친 기계장치의 소음.

 

 무너져가는 이 자리에 내 앞에 설 만한 이는 분명 단테뿐일 텐데, 왜 신발은 여럿일까.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아무래도 좋을 의문이 떠오르다 그대로 진다. 꼭 꽃이 피려다 마는 것처럼.

진 의문은 둔한 흔적만을 남긴다. 그건 탁한 악의가 낀 예지에 가까운 예감.

 

 이 악몽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꿈의 주인이 바뀔 뿐. 그렇다면 그건 여전히 내 악몽일까, 아니면, 당신의 악몽이라 불러야 할까. 낯선 신발의 주인에게 이를 물어봤자 답은 돌아오지 않겠지. 그건 단테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리라. 결국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의문을 녹이며 나는 눈을 감았다. 바라던 결말의 대가는 만족감도, 당신도, 끝조차도 없는, 마냥 텅 빈 어둠이었다.

 기회를 줄게. 네가 바라는 결말을 맞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돌아갈 수 있게.

 단, 부탁은 언제나 ‘제발’ 을 붙일 것. 그럼 힘내.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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