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게는 퍽이나 익숙한 거리였다.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에는 사람들과 교통편이 붐벼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거리. 물론 해가 지고 난 이후에도 사람들은 많은 거리였다. 뉴욕에 사람이 없는 날이 더 이상한 날이지만. 항상 밤 또는 새벽 사이에만 걸어 다녔던 이 거리를, 대낮인 지금 걷는 이유는 하나였다. 물론, 일과 관련된 이유이기에 밝히기는 힘들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위치 파악을 위해서였다. 어느 길이 제일 안전할지에 대해. 그리고 가장 빠른 길까지 알아두기 위해.
쇼핑을 하기 위해서 걷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먹고 싶어서 걷는 것도 아니었으며, 바람을 쐬기 위해 걷는 것도 아니었다. 찾고 있는 건물을 아직 못 찾았기에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분명히 내게 알려준 위치가 이 어디쯤이었는데. 기분이 나빠졌다. 뉴욕 거리가 주 무대인 내가 길을 잃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여기서 그 건물 하나도 제대로 못 찾고 헤매고 있다고? 기분이 나빠져서 입술을 꾹 깨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으로 둘러보는 거리의 분위기가, 답지 않게 이상했다. 묘하다. 정확히는, 스산함과 음침함이 같이 느껴졌다.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니까 그럴 수 있다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한낮에 음산함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대체 무엇 때문에?
“……. 이상한데.”
“뭐가?”
말 한 마디를 나지막하게 뱉었을 뿐인데, 누군가가 날 바라봤다. 중얼거린 말이 들릴 정도의 위치는 아니었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얼굴이 날 보고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데자뷰? 그렇다고 데자뷰도 아니었다. 아. 떠올랐다. 내 말에 대답을 해준 상대는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분명히 내 앞에 이 사람은.
“맞아. ……. 그 날 날 찾아왔었지? 내가 애원했는데도 불구하고 넌.”
그럴 리가 없다. 죽은 사람이 다시 되돌아올 수는 없는데. 혹시 이 사람만 내 앞에 이렇게 있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다 내가 처음 보는 얼굴이라면. 그러면 환상이라고 해도 믿을 텐데. 그동안 잠을 제대로 못자서 피곤한 탓에 꾸는 악몽이라던가, 아니면 헛것을 보고 있다던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재차 기분이 나빠졌다. 무슨 일을 하던지, 거짓말을 할 때도 이러진 않는데. 두려움. 그래, 지금 찾아온 감정은 아마도 두려움 일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빠르게 심장이 뛰는 거겠지. 하지만 천천히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긴장을 했다는 것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이는 순간 지는 게임이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게임에서 지고 싶지 않으니.
“응, 계속 이야기 해봐, 거기서 끊으니까 재미없잖아. 그래, 내가 너 죽였어. 근데 문제 있어? 나는 그저 우리 측으로 널 죽여 달라는 의뢰가 들어와서 행했던 것뿐인데. 뭐, 그 사람 이름이라도 알려줄까? 뭐였더라, 이름이? 제임스? 그 사람에게 가서 그러지 그래? 나한테 그러지 말고. 원한이 아주 깊은 것 같던데 말이야.”
내 말이 다 끝난 것이 아님에도, 그는 주먹 쥔 손을 떨고 있었다. 화가 차오르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저러다가 주먹을 날릴 테지.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따라와야 하는데. 아, 환상이라서 그런가. 그가 뭐라고 말을 하는 동안 주변을 잠깐 둘러봤다.
이상하게 느껴졌던 기분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이상했다. 거리는 분명히 뉴욕이었고, 전광판에 찍혀있는 날짜와 시간도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니, 나와 스쳐간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환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았고, 그렇다고 꿈이라고 하기엔.
“……. 꿈을 꾸는 건가, 내가?”
“꿈?”
“꿈이라고?”
제기랄. 잊고 있었다. 꿈에서 꿈이라는 단어를 뱉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날 향해 보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아는 사람들. 정확히는 내가 죽인 사람들이었다. 최대한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인데,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근육이 굳어가는 것처럼, 한걸음만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아냐, 심호흡하고, 천천히 움직여.
어떻게든 웃음을 지으면서 그들과 마주하며 뒤로 한걸음씩 움직였다. 내가 한걸음 내딛으면 그들은 두 걸음을 떼었다. 그들은 내게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가 바뀌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이 사라졌고, 내가 보고 있던 전광판의 시계와 날짜는 지워져 있었다. 암흑만 남았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얼굴은 너무나 뚜렷했다. 빌어먹을. 이러는 게 아니었다. 후회가 들었지만 그런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방법을 생각해봤다. 어떤 방법을 써야 그들에게 안 잡힐,
“무슨 생각해?”
방법이 없구나. 팔이 붙잡혔다.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깨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그저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밖에 들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팔이 잡혀, 그 박동은 그에게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가 잡고 있던 팔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권총을 하나 꺼내들었다. 내가 그에게 했던 짓이, 내게 다시 돌아오고 있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입술 안쪽을 최대한 티나지 않게 깨물었다.
“두려우신가봐, 보스가?”
“내가? 천만에. 그렇게 보였나봐?”
“지금도 그렇게 보이는데.”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아쇠에 손이 올라가 있고. 그러니까, 저 방아쇠를 당기면 끝인 거지. 눈을 잠깐 감았다. 자기야-. 날 부르는 걸까. 익숙한 호칭인데. 설마, 루도 여기 같이 있는 걸까. 아니었으면 했다. 아니어야 하는데. 여기에 같이 있으면.
“유니스, 자기야. 일어나봐.”
어깨를 흔드는 손길이 거슬려 툭 쳐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숨을 빠르게 몰아쉬었다. 머리가 아팠고, 등이 축축했다. 암흑이었다. 아니, 천천히 시야가 잡혔다. 방이었다. 그러니까, 내 어깨를 흔든 건 내 옆에 앉아서 날 보고 있는 루였고, 나는 루가 내민 손길을 쳐낸 것이었다. 머리를 짚은 상태로 숨을 돌렸다. 꿈에서 깨어났다. 다행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뛰는 심장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루의 손을 쳐낸 것이 걸려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 자기야. 나 여기 있잖아. 응? 괜찮아.”
“후우…….”
“입술 피나겠다. 그만 물고. 걱정 마, 나 어디 안 가. 여기 있을게. 일단 물부터 마시고, 진정하자.”
침대 옆, 협탁 위에 있는 스탠드를 켜고서는 빈 잔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서는 내게 건네주는 루였다. 잔을 받고서 물을 마시는 동안, 루는 내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고, 익숙한 손길을 받으면서 물을 마저 마셨다. 그 잠깐 사이에 잔이 비었고, 루는 내 손에 있던 잔을 가져갔다.
“어떻게 해줄까, 자기야? 조금 더 깨어있을래?”
“응, 숨 좀 돌릴래. 고마워.”
“수면제 필요하면 이야기 해. 여기 있으니까.”
다정함은 어디 가지 않았다. 루의 말에 웃음을 옅게 지었고, 루는 다시 날 안아줬다. 그리고서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면서 머리에 입을 맞췄다. 루가 주는 포근함에 느리게 숨을 돌리면서 눈을 감았다. 등을 적신 식은땀이 마르면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고, 그걸 느낀 루는 이불을 끌어올려 날 덮어줬다.
“자기, 자니?”
“아니, 아직 안 자.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
“자도 괜찮아. 옆에 있을 테니까. 또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깨워줄게.”
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루에게 기댔다.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다시 찾아오는 안정감과 나른함에 긴장이 풀렸다. 이제는 괜찮아지겠지. 다시 꿀 일은 없겠지. 악몽을 두 번 연속으로 꾸는 그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루에게 기댄 채로 토닥임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감은 것을 봤는지, 루는 팔을 풀고 천천히 날 눕혔다. 나른하게 눈을 뜬 채로 루를 올려다보자, 루는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그 상태로 이마에 입을 맞춰줬다.
“누워서 자야지. 그러다 목에 근육통 오니까.”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고, 너무 다정한데, 자기야?”
“너 지금 눈 반쯤 감긴 거 알아? 얼른 자. 걱정 말고.”
“잘 자, 꿈에 찾아와줘야 돼.”
“응, 이번엔 꼭 찾아갈게. 꿈에서 봐.”
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자세를 바꿔서 누워있는 상태로 루의 품에 안겼다. 루는 아무 말 없이 안아줬고, 그렇게 다시 어둠에 몸을 맡겼다. 모든 생각들을 지워버린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