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좌에 앉아서 다리를 꼰 채로 아래를 내려다 봤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건조한 눈빛은, 왕좌 밑에 서 있는 백금발의 상대를 향하고 있었다. 그와 대비되는 짙은 흑발, 녹색과 검은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어두운 의상, 그리고 건조한 벽안과, 조금은 매서운 외관이 분위기를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와 마주하고 있는 백금발의 상대 역시, 날카로운 외관이었고, 건조한 눈을 마주하고 있는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덤덤했다.
고요했다. 날카롭고 위험한 분위기 속에서,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시선을 맞추고 있는 둘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면서 서로를 눈에 담아둘 뿐이었다. 얼핏 보면 노려보는 시선이었지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태연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두려움이 담기지 않은 벽안과 건조함이 담긴 벽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캐서린.”
무미건조한 공백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공간을 메우는 것처럼 메아리치는 목소리는 위엄이 가득했다. 소리에 위축될 법도 했건만, 캐서린은 덤덤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군주에게 평소에 보이는 모습과 같았다. 어떤 꼬투리도 잡지 않고, 무조건 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 항상 해오던 자세였고, 가장 익숙한 모습이었다. 캐서린을 불렀던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내려오면서 캐서린의 앞까지 다가왔다. 캐서린은 당당하게 그의 시선을 마주했고,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장난기가 조금 섞여있는 모습과는 달리 진지해 보이는 표정에서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캐서린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차갑지 않았고, 바라보던 눈빛에 있던 덤덤함도 지워졌다.
“아스가르드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것 같구나.”
“그 말은,”
“그래. 날 가두던 그의 힘이 약해졌다는 이야기지. 그 날이 더 빨리 오길 기다렸건만.”
“그렇다면 지금 돌아가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폐하가 느낄 정도로 약해진 것이 맞다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듣기로는 아스가르드의 왕좌가 비어있다지.”
헬라의 이야기에 캐서린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스가르드를 중심으로, 다시 시작되는 아홉 왕국 정복. 그는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그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고, 그저 헬라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면서.
“그가 죽는다면, 아니. 죽지 않더라도 난 아스가르드로 돌아갈 것이다. 아스가르드로 돌아가, 내 자리를 다시 찾고 난 후에 널 부르마.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요?”
“똑똑하긴. 그래, 여기 이 헬에서, 내가 다시 너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거라. 모든 것이 정리가 되고 피의 향연이 다시금 펼쳐지는 날, 널 그곳으로 데리러 오마.”
헬라의 이야기에 캐서린은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기대에 부푼 아이처럼, 캐서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캐서린의 미소를 보며 헬라 역시 비릿하게 옅은 웃음을 지어냈다. 자신의 야망을 다시 펼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지어진 웃음이었다.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을 날이 머지않았다. 헬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가르드로 돌아갔다.
헬에는 캐서린만 남았다. 헬은 싸늘했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고, 남아있던 생기마저 죽어 암울했다. 왕좌의 주인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고, 스산한 소문들이 나돌았다. 하지만 캐서린은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인은, 군주는, 황제는, 자신이 섬기는 죽음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다만, 그 대군들을 맞서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그렇게 믿었다.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본인이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키는 존재였으니까. 소문들을 들으면서도 천천히 숨을 골랐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갑옷끼리 부딪히면서 내는 소음이었다. 그리고 그 소음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스며드는 소음들 사이에, 자신이 기다리던 존재가 서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그는 죽음을 몰고 왔다. 그 많은 대군을, 홀로 상대했다. 지친 기색은커녕, 오히려 즐기는 모습을 보였고, 보란 듯이 그들에게 안식을 선사했다. 항상 봐오던 모습이었다. 전장 속에서의 그의 모습은, 생기가 넘쳤다. 눈에는 욕망이 빛을 내고 있었고, 행동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몰려드는 군대의 수도 끝이 나지 않았다.
“폐하!”
그를 불렀지만, 그 소리는 군대의 소리에 빠르게 묻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는 자신의 발 밑에 놓일 시체들을 계속 쌓아갈 뿐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활보하는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자신을 막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죽음을 선물했고, 망설임 없이 한걸음씩 나가고 있었다.
별 다를 것 없는 전장이었다. 하지만 캐서린에게는 그 모습이 위화감이 들었다. 자신을 보고서도 공격을 하지 않는 군대의 모습에,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뒤돌아보지 않는 헬라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헬라에게서 받은 블러드엑스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헬라의 뒤를 공격하려는 군사를 향해 휘둘렀다. 단말마가 자신의 뒤에서 들리자, 헬라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라 했건만, 캐서린.”
처음으로 느껴지는 위압감이었다. 헬라와 마주하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두려움이 지금 느껴졌다. 들고 있던 블러드엑스를 다시 넣어뒀고, 헬라를 똑바른 눈으로 마주했다. 그러면서도 검을 만들어내며 헬라의 뒤에 있는 군대를 서슴지 않고 베어냈다. 하지만 헬라는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임 하나 보이지 않았고, 그저 캐서린을 노려볼 뿐이었다. 자신의 약속을 어긴 캐서린을 보는 눈에는 비난이 가득했다. 질책하는 목소리로 캐서린에게 말을 건넸고, 캐서린은 헬라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행동을 멈췄다. 처음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보는 헬라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 사이에 참을성이 사라진 게냐, 아니면. 때 아닌 사춘기라도 찾아와 나에게 반항을 하고 싶은 게냐.”
“제가 폐하에게 반항을 할 리가요. 저는 다만,”
“그런데, 왜 네가 이곳에 있지?”
“그야, 폐하를,”
“나를? 변명이라도 들어줄 테니 해 보거라. 나를 뭐?”
헬라의 모습을 보던 캐서린은 입을 다물었다.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네크로소드가 자신에게 겨누어져 있었기에, 말을 끊었다. 군대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헬라는 그것을 막지 않았고, 오로지 캐서린만 상대할 뿐이었다. 고개를 위로 든 채로 네크로소드를 내려다보는 캐서린을 보며, 헬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분명히 말하지 않았더냐. 모든 것이 정리가 된 후, 널 데리러 오겠다고. 그런데 그 사이에 이리 나서?”
“저는 단지 폐하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을 막고자,”
“어리구나, 아직도. 내가 너에게 헬을 맡기고 아스가르드로 온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더냐?”
헬라의 질문에 캐서린은 다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잘못한 것이 맞았다. 기다리라고 한 약속을 어긴 것은 자신이었다. 그랬기에, 캐서린은 헬라에게 더더욱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상대의 칼날이 헬라의 몸을 관통했고, 헬라는 기분 나쁜 듯 표정을 찌푸리고는 칼날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칼을 휘두른 군인에게 던지는 헬라였다. 헬라를 보고 있던 캐서린의 시선이 흔들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헬라라면, 지치지 않는 존재였다. 그가 던지는 단검들의 명중률은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본 헬라의 모습은 달랐다. 관통 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명중률이 떨어졌고,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기에 캐서린은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헬라를 부르는 것도, 도와주는 것도. 그저 멍하니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칼 하나가 그를 스쳐갔다. 상처를 남겼다. 상처가 나지 않는 몸에, 상처가 남았다. 자신의 죽음이, 다른 누군가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캐서린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의 기운이 약해졌다. 그랬기에 더더욱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무너질 리가, 이렇게 쉽게 끝을 맞이할 리가 없다. 약한 모습을, 빈틈을, 상대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서 그를 끌고 와야 했다. 넣어뒀던 블러드엑스를 다시 꺼냈다. 그 순간, 다른 칼 한 자루가 헬라를 꿰뚫고 지나갔다. 마주한 얼굴이 캐서린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한쪽 입꼬리만 말렸고, 그 자리에서 헬라의 흔적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캐서린이 있던 자리도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조금 더디게 눈을 떴다. 여러 차례 깜빡이고 나자 주변의 시야가 잡혔다. 왕좌. 그리고 그 위에 앉아있는 자신. 누구도, 무엇도 없이 비어있는 홀. 모든 것이 혼자인 곳에서 캐서린은 눈을 다시 감았다. 조금 전, 자신이 헬라를 본 것은, 꿈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내뱉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을 진정시키는 캐서린이었다. 부재가 길어짐으로,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말이 많아짐으로 인해 이런 꿈을 꾸는 것이다. 단지 그 뿐이다. 불안함에 찾아온 악몽일 것이다. 캐서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