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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비X유하

* 피폐하고, 어두운 글입니다.

 

 

 

 

 

 눈앞에 당신이 있다면, 단순히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크게 다쳐도, 하다못해 손이 닿지 않아도, 그저 앞에 있는다면, 바라보기만 해도 좋으니 당신은 평생 자신의 앞에만 있어 달라고. 죽지 않길, 떠나지 않길 바란다고 수없이 되 뇌이고, 되뇌어 큰 욕심 없이 당신을 원하겠다고 유하는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제 앞에 있는 라비가 자신의 악몽일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었다. 사랑이고, 빛이고, 희망이고, 세계인 그가 동시에 절망이고, 불운이며, 악몽일 수는 없었다.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이 공존한다면 분명 그러한 감정을 품게 된 유하의 문제였다. 그 사실을 유하는 아주 천천히,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라비는 몰랐으니까. 유하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얼마나 깊고, 처참하며, 사랑스럽고, 반짝였는지 몰랐으니까. 유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라비가 참 좋았다. 어떠한 말이 오고 가지 않으며, 단순히 시선을 옮기기만 했는데도 제 눈 안에 꽉 차게 들어오는 초록빛의 눈 색이 좋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깊고 깊은 검은색에 스며들 초록색의 빛은 세상에 존재하는 색들보다 밝고 예뻐 이왕이면 자신의 안에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겼었다. 누가 봐도 이기적인 욕망을 유하는 몰랐을 리가 없다. 오히려 이기적이었기에 그 과정에서 비록 라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는 게 당연했다. 자신이 사랑하니까, 주면 그만이니까. 그것이 유하가 스스로 외면하고 있던 욕망 중 하나였다. 라비는 유하에게 있어 악몽이며, 희망이고, 행복이며, 불행이었다. 그 누가 부정한다고 해도.

 

 

 

 

*

 

 

 " 이렇게 보니까 당황스러워? 나도 좀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 "

 남색의 짧은 머리카락, 유하는 자신이 했다면 어울릴 수 없는 헤어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고, 그나마 관리하는 짧은 머리카락도 다시 기를 정도로 제 외모에 크게 신경 쓰게 되었다. 자신이 여자라서, 가 아니라 그저 그가 예쁜 사람을 좋아하니까. 자신이나 리나리를 예쁘다고 말해주는 라비의 스트라이크존이 넓은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무리 신경써도 사랑하는 사람 눈에 마음에 들고 싶어하니까. 그렇다고 스타일이 완전 변했다거나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의외로 이런 쪽에 자존심 있는 유하는 자신의 스타일도 꽤 고집하는 편이었고, 가장 큰 이유는 크게 다친 상처 때문이었다. 본래 기르던 앞머리를 눈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냅둔 것도, 방주 사건 이후로 생각보다 눈에 띄는 이마의 상처가 거슬렸다. 라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고. 걱정할 까봐 보여주고 싶지 않고. 힘들어 보이는 라비가 좋은 것만 봤으면 좋겠는 마음도 있으니까. 온갖 이유를 가져오며 변화한 스타일을 최대한 유지하다 보니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라비에게 들은 말은 예쁘다는 말뿐이었지만. 어쨌든, 저 소녀는 무얼 알고 의외라는 말을 하는 걸까. 로드 카멜롯의 능력이 뭐였더라, 꿈을 보여준다고 했었나. 악몽이랬나. 라비는 무얼 봤다고 했지. 말하지 않아도 알 법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나온 건 확실했다. 얼버부리는 모습이 의외로 귀엽구나, 정도 생각했으니까.

 " 아무 말도 안 하네? 스스로 생각하기 의외가 아니었던 거야? "

 유하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약점을 파고 드는 거라면, 라비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라비는 저의 유일한 약점이다. 공격할 수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공격할 수 있냐면, 공격할 수 밖에 없다면, 할 수 있다. 이상하지 않다. 결국, 어느 쪽이든 라비가 눈 앞에 있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저 조금 놀란 건, 자신의 과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올 줄 알았어, 나오면 안될 것들이.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거였나, 아니면 저 소녀가 이쪽이 더 끌린 걸까. 라비라는 존재로 추정되는 것에 시선을 돌리고, 유하는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입을 열어 말을 하겠다는 신호와 마찬가지였다.

 

 

 " 의외인 걸요, 라비를 보여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좀 더 유리한, 저를 망가트릴 것들이 있으니까요. "

 " 아, 그거~ 그것도 좋지만, 이쪽이 더 재밌어보여. 설마, 공격할 생각? 소중한 연인이잖아. 아니면, 그만큼 소중한 존재는 아니었어? "

 " 소중해요. 하지만... "

 다시 입을 다문다. 소녀가 하지만? 하고 따라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 뒤의 말이 궁금한 듯했지만, 유하를 처음 보는 사람은 간혹 당황스러울 정도의 습관이 그녀에게 있었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면 이야기를 하다가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점점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처럼, 혹은 전부 보기 싫은 것처럼. 처음에 라비도 당황했었지. 또다시 과거에 빠져든다. 오로지 자신만이 있다.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을 이렇게 추악한 마음을 들게 만드는 것도 라비였는데. 다시 놓기 싫게 만든 것도 라비다. 그러니까, 유하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한두번 생각했던 게 아니라고, 라비를 제 손 안에 가둘 수 있다면, 하지 못할 일도 없다. 그를 죽이는 것도, 가두는 것도. 혹은, 그 반대로 자신이 죽거나, 가둬지거나. 라비가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니고 싸우는 것쯤은 해볼만 한 일이다. 오히려 그를 죽인다고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그 다음에는? 라비, 내가 꿈에서 널 죽였어. 말할 수 있을리가 없다. 라비도 겪었다고 해서 이해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라비는 어떻게 해결한 걸까? 죽을 뻔했다면 실패했다가 겨우 성공한 것일까? 자신을 상대로 싸우지 못했던 걸까? 저 소녀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라비는 어떻게 했냐고. 나를 죽였나요? 동료를 공격했나요? 문제없이 빠져 나왔나요. 물어본다면 답해줄 것만 같았다. 라비가 성공했든, 실패했든 말해주는 게 소녀의 입장에서 즐거울 일이라 생각했다. 입을 더 이상 열 생각은 없지만.

 " 재미없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

 

 결국 자신의 침묵을 기다리지 못한 소녀는, 우산을 가볍게 휘둘렀다. 시작했다는 신호겠지. 레로를 소중하게 여겨주세요, 로드님~! 하고 우산이 말하는 부분에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라비를 향해 주먹을 휘두를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엑소시스트이자 싸움 경험이 다분한 라비하고 싸우려면 어쨌든 제대로 된 방어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완전히 여유가 없는 건 다른 문제였지만.

 " 무리없이 싸우네? 나랑 싸우는 건 힘들어 할 줄 알았어. "

 " 대련 정도는 같이 했잖아요? 그것보다... "

 

 

 당신이 정말 라비라면, 오히려 나를 공격할 수 없는 건 그쪽인 걸요. 모순적이게도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좋아하는 유하와 달리 의외로 라비 쪽에서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한 편이었다. 대련할 때마다 그랬으니까, 제대로 된 대련이 되지 않아 금방 관두는 일이 많을 정도였다. 그러니 유하의 머리에서 나온 라비라면, 실제라면,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 그 생각이 드니 오히려 냉정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빈틈이 보이는 것도 같고. 그렇다고 여전히 라비에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악몽이며, 희망이고, 불행이며, 행복인 그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 있을리가. 애초에 노아를 만나는 건 없던 계획이었다. 혼자 오는 임무에 노아와의 만남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맞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궁금하지 않아, 북맨 주니어가 무얼 경험했는지. 겨우 그런 말에 넘어갔을 정도였다. 유하는 그 정도였다. 그저 깊은 곳에 숨겨둔 욕망을 꺼냈을 뿐이었다. 여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라비에게서 멀어지고, 방아쇠를 당긴다. 달려오는 라비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평소와 다르게, 더더욱 무표정에 가까웠다.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지은 건 아니었다. 라비는 그 표정을 보고 집중의 표정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니야, 라비. 그런 게 아니야. 지금 내 표정은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들켰을 때, 예를 들면 악마와 싸우는 자신에게 희열을 느꼈을 때와 같은 거. 들키고 싶지 않은 욕망이 나왔을 때 나오는 표정이야. 이 또한, 말할 수가 없었다. 쓰러지는 라비를 보고 다시 소녀를 찾는다.

 " 라비는, 어떻게 했나요? "

 " 뭘? "

 모습이 보이지 않은 채,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유하는 자신의 말에 더욱 힘을 실었다. 겨우 질문 하나 던졌을 뿐인데, 다시 일어나는 형체에 시선을 돌린다.

 " 어떻게 빠져나왔냐고, 묻는 겁니다. 나를 찔렀나요? 당신을 찾아내 이겼나요?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났나요. "

 " 음~, 알려줄까 말까 고민했는데 말야. 물어보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북맨 주니어는, 스스로를 찔렀어. "

 지금의 너와 말도 안될 정도로 재밌었는데 말야, 덧붙이는 말까지 듣고 나서야 제 무기를 다시 쥐어잡았다. 대단하구나, 라비는. 자신을 찌르고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걸까, 그 정도로 자신과 동료를 생각해주었구나. 역시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끌리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짙은 흑빛에 유일하게 들어오는 에메랄드빛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진한 색일지도 모른다. 한 번 박히면 사라지지 않을 만한 그런 색. 방아쇠를 또다시 당긴다. 아무리 죽여도 가질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을 겨우 부르며 쓰러지는 저 형체도, 실제도 가질 수 없다. 어두운 자신의 욕망일 뿐이다. 놓아야 한다면 부디 제 손으로 놓지 않고 스스로 떠나가기를. 여러 번 쓰러지는 형체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끝났나요, 라고 묻는 말에 바빠서 가야 해, 하고 대답이 돌아온다. 겨우 눈을 떠 보이는 어두운 하늘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여전히 말할 수 없다. 라비, 내가 오늘 라비를 죽였어요.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소녀의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 죽이고, 죽여서, 빠져나왔어요. 어떠한 표정이 돌아올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야. 그저 지독한 악몽이 지나간 것뿐이야.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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