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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밤이었다. 먹물로 칠한 것처럼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달과 별들의 눈을 피하여 두 인영이 숲속으로 들어왔다. 앞서가는 인물의 그림자는 머리에 동물 귀가 달려있었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자보다 덩치가 왜소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자는 머리에 무언가가 없었고, 머리에 띠를 묶어 뒤통수 뒤로 두 개의 띠가 바람에 따라, 움직임에 따라 살랑살랑 움직였다. 


 -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깊숙이 들어오고 앞의 인영이 멈추자 뒤의 인영도 따라멈추었다. 인영이 가만히 있다가 몇 걸음 가 서자 낮은 목소리가 숲의 정적을 깼다. 땅 위의 울림에 달과 별들이 그들을 찾았다. 구름에 숨어있었던 달과 별들이 땅을 향해 빛냈다. 나무들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뒤에 서 있었던 자는 머리 띠를 매고 M자 앞머리에 천 옷을 입은 흑발의 소년으로 눈매가 날카로웠다.


 - 저를 죽여주시겠어요? 


 소년의 앞에 있는 그림자의 주인공이 입을 열었다. 인영은 소년과 같은 나이 때로 보이며 순한 인상의 소녀였다. 미성의 목소리로 소녀는 소년에게 잔인한 부탁을 했다. 바람이 어깨에 닿지 않을 정도로 짧은 소녀의 단발을 건드리며 날렸다.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소녀를 응시하다가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소녀가 기다리라며 붙잡으려고 하자 소년이 말했다. 


 - 정말로 죽고 싶을 때 이야기 꺼내라. 너... 


 두려워하고 있잖아. 소년의 말에 소녀가 움찔였다. 소녀는 겨울바람 탓이라고 우겼다. 두려움에 떠는 몸을 추위라고 말했다. 소년은 다시 소녀를 쳐다봤다. 자신은 몸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불안하게 일렁였다. 눈은 거짓말을 못 하는군. 소년은 소녀를 깔보며 막사로 돌아갔다. 뒤에서 소녀의 시선을 느꼈지만 알 바 아니었다. 

 *

 잠깐 잠들었는데 또 이런 꿈이군. 신스케는 탁자에 엎어진 상체를 일으켜 흩트려진 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방 안에서 제 숨소리 말고도 색색거리는 다른 누군가의 숨소리에 신스케는 주인공을 찾으려 상체를 돌렸다. 두 명이 누워 잘 수 있는 이부자리에서 이불을 얌전히 덮고 곤히 자는 리코였다.

 꿈속에서 본 과거의 리코의 모습과 겹쳐 보여 신스케는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과거에 그런 말을 했지만 현재 자신과 사귀는 이후부터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 악몽을 부정하려고 했으나 과거의 리코는 한 번 폭주하고 나면 잠이 많아졌는데 지금의 리코도 영 잠을 깰 생각을 안 한다.


 - 리코, 일어나. 


 신스케와 리코는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에 한 번 밀회를 해 신스케로선 리코가 그동안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불안감에 신스케가 리코를 흔들어 깨우자 리코가 비몽사몽 깨어났다. 다시 자려고 눈을 감으려 하자 신스케는 리코의 허리를 팔로 감아 당겨 제 품에 안기게 하여 등을 토닥였다. 


 - 몇 시인데 그래...
 - 15시간은 잤어. 이제 그만 일어나. 오래 자는 것도 건강에 나빠. 
 - 그렇게나...? 


 신스케의 품 속에서 리코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며 잠에 취해 비척거리며 욕실로 갔다. 오래 잠들어 있었지만 악몽을 꾸지 않았고 평상시랑 반응이 똑같았다. 단순히 겨울이라서 동면에 들어가는 건가? 리코가 반은 사람이지만 반은 여우라 신스케는 그렇게 수긍하기로 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도 리코의 잠은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

 꿈을 꿨다. 그 과거에서 시간이 더 흐른 과거의 꿈이었다. 이번에는 숲 속이었지만 저번과는 다르게 울창하지 않아 환했다. 리코의 표정이 처연했다. 모든 걸을 놔버린 사람처럼 눈에 생기가 없었다. 눈동자가 한없이 어두웠다. 신스케를 무표정으로 보던 리코가 정적을 깼다. 


 -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저를 죽여주세요. 
 - 네가 정신이 불안정해서 생긴 사고였어. 
 - 저한테 위협 당하셨는데도... 신스케 씨는 상냥하시네요.


 신스케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거절의 뜻을 알고 리코는 더 이상 부탁하지 못하고 칭찬을 하며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웃어 보였다.참으로 슬픈 미소였다. 리코의 얼굴에 신스케는 자신의 심장이 욱신거렸으나 티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 정신을 거의 잃었어도 공격적 본성을 눌렀잖아. 그걸로 됐어.
 - 다음에 안 그런다는 보장이 없어요.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점점 제가 제 자신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리코가 신스케와 마주하던 몸을 돌려 꿈속에있는 신스케의 눈과 마주쳤다. 신스케는 과거를 회상했다. 리코가 뜬금없이 엉뚱한 곳을 보고 이야기했지만 힘들어서 자신을 마주 보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 짐작했다. 아니었다. 리코는 미래의 신스케가 이 시절을 꿈으로 꾸리라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 제가 제 자신이 아니게 될 때는 확실히 베어주세요. 모습만 같은 다른 사람이니까요. 


 이렇게 자신을 보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리코,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그런 말을 하지 마. 선생님을 잃은 것도 모자라 사랑하는 너를 베어달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리코한테 손을 뻗었지만 리코는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시야가 어두워져간다.


 꿈에서 깨어났다. 리코한테 그때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었건만 애석하게도 리코는 옆에 없었다. 그 후 리코에 관한 악몽을 꾸지 않게 됐다. 리코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자취를 감춰 만날 수 없게 됐다.

 그리운 너와 재회하게 됐을 때는 네 옆에 우츠로가 있었다. 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너였다. 네가 아니라면 밀회에서 속삭였던 사랑의 말을 모를 테니까. 네가 말한 대로 너지만 네가 아닌 너와 만났다. 악몽은 걱정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경고였다.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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