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상악몽(同床惡夢)의 비익
※ 드림주는 이름과 설정이 명확한 오리지널 드림주입니다.
※ 악몽 속에서 원작 캐릭터 사망 묘사 주의
아비규환이라는 표현조차 사치.
이곳에는 오로지 죽음과 파괴만이 펼쳐져 있다.
전장은 이쪽의 패색이 짙었다. 끝없는 적 앞에 지구연방군의 병력은 괴멸한 상태.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교전은 그나마 목숨만 부지한 자들의 발악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마저도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아군이 얼마나 남았을는지. 지푸라기 붙잡는 심정으로 마음의 채널을 열어도, 생존자의 희박한 마음 따위는 거대한 사념의 파도에 휩쓸려 건질 수도 없었다. 대신 영혼 구석구석까지 빼곡히 들이차는 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을, 파괴를 노래하는 아우성.
부수어라. 짓밟아라. 해체하라. 죽여라.
지우고 배제하고 분쇄하며 말살하여 괴멸과 소멸로 이끌라.
파괴하고 파각하고 파쇄하고 파멸한 끝에 사멸하라.
재세가 의미를 잃을 만큼 파계하라.
어차피 모든 것은 원초인 어둠으로, 완전한 공허로, 영원한 허무로 돌아가리니!
그런데도 이것은 결코 악의가 아니다.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고 사멸하기 위해 태어난, 순수하리만치 올곧은 파멸 충동일 뿐. 재앙의 문에서 온 파괴마들은 그저 숨 쉬는 것과 같이 생명의 불씨를 꺼뜨린다.
“각 기, 상황을!”
“상황도 뭣도……보면 알잖아요?”
“마치 칼리 유가의 끝이로군……요!”
“오히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거든! 아─젠장, 총신이!”
그 와중 나의 전우들, 한때 「FDX팀」이라 불렸던, 적에게 죽음을 고하는 새의 일원들이 아직 발버둥 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건대 이미 한계에 치달았을 테지. 기동병기의 탄약과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으며 칼날은 언젠가 무뎌지고 부러지게 되어 있다. 장갑은 두드리다 보면 우그러지고 깨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통신 회선을 타고 어지러운 외침이 날아다닌다.
“음. 냉정하게 생각해서, 승산은──”
“조용히 하라구. 혹시 얼간이처럼 우는소리나 할 거면 너부터 쏴 버릴 거야, 베스너. 그다음에 저놈들도 싹 쳐부숴 주고 돌아가서 발 뻗고 자는 것도 좋겠는데! 에잇!”
“실로 두르가다운 기개로군요. 저도 질 수 없겠어요.”
“……요즘 티아나의 말투가 옮은 것 같은데, 리에타 소위.”
“농담은 치워두고, 이쪽은 이제 정말 탄약이 끝인데요. 아가씨, 이번에는 어떻게 할 수 없겠어요? 물불 가릴 때는 아닐 텐데.”
“할 수 있다면, 진즉에 했을 거야.”
“퓨네럴5, 그게 무슨 뜻이지?”
“응답이 없어. 힘을……쓸 수 없어.”
나는 초조함을 되도록 누르면서도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이 사태를 타개할 히든카드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아무리 불러도 내 안에 잠재된 ‘신’께서는 깊은 잠에 빠진 양 도무지 응답하지를 않았다. “정작 필요할 때 쓸모가 없잖아요, 그거.” 지머의 비아냥이 돌아왔지만, 무엄하다고 반박할 수 없는 것이 분할 따름이다.
최후의 보루가 사라졌다 해서 적이 사정을 봐줄 리도 없기에, 나는 무력감을 떨치려 이를 악물고 조종간을 억지로 쥐어 비틀었다. 고작해야 아슬아슬한 회피 기동이 한계. 반격할 기운 따위는 없었다.
한계에 닥친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으리라. 지금까지의 분발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팀의 기세는 눈에 띄게 쇠해 가고 있었다.
“아아……끝이에요, 끝. 이제 더 싸우려야 싸울 수도──”
이윽고 날갯짓을 포기한 고사조(告死鳥)는 소멸을 맞이한다.
아무리 지금까지 분투해 왔어도 하늘을 메우고 땅을 뒤덮은 군단에 한 번 밀리면 거기서 끝. 탄약이 동난 시점에서 운명은 결정된 셈이다. 애초에 고작 아머드 모듈 1기가 갖춘 CIWS 정도로, 빈틈없이 빗발치는 미사일과 광탄의 팔랑크스를 요격해 낼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근접 무장으로 뛰어든다 해도 목숨을 재촉하는 짓밖에 되지 않으리라.
본능적으로 동체를 가리는 팔도 도망치고자 불을 뿜는 슬러스터도 부질없는 발버둥이었다. 순식간에 검은색 《가다이드》는 형체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꿰뚫리고 꿰뚫린 끝에 산산이 해체되어 스러지는 강철의 거인. 단말마조차 파열음에 뒤섞여 묻힌다. “지머!”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올 리가 없었다.
“극한의 시련 속에서 맞이하는 죽음……본래는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이건 아무래도, 유쾌하지 않…….”
고사조가 또 하나, 날개가 꺾여 추락한다.
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피할 곳을 잃고 떨어져 내린 흰 《가다이드》의 몸체가 게걸스러운 금수 떼로 뒤덮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쌍검을 휘둘러 아무리 베어 가르더라도 금세 새로운 적이 그 자리를 메우며 주둥이를, 발톱을, 꼬리를 들이댄다. 조금이라도 놓칠세라 갈기갈기 잡아 찢으려 달려드는 앞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결코 추한 소리를 내지 않는 전사의 고결함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누군가의 긍지를 욕보인다는 자각 따위 없이 저들은 추락한 새를 강철째로 무작스레 갉아 부수어 피 한 방울, 영혼 한 조각마저 남김없이 포식할진대.
“젠, 장……! 아직이야, 아직이라고! 내가 어디, 그렇게 쉽게……!”
어떤 고사조가 짓밟힌다.
머리를 뽑히고 다리가 잘려나가고 한 팔이 절단되어 남은 한 손으로는 총신이 우그러져 더는 발포할 수도 없게 된 버글러 건의 방아쇠를 몇 번이고 덧없이 당기는 흰 《게슈테르벤》. 이빨과 발톱을 뽑혀도 야수는 야수인 것처럼, 팔다리를 잃어도 전사는 살아있는 한 전사라 할까.
그러나 곧 거인형의 적이 철퇴를 휘둘러 《게슈테르벤》의 동체를 무자비하게 뭉갠다. 정면 장갑이 우그러지고 바스러져 푹 꺼진 순간, 악에 받쳐 갈라진 포효가 뚝 끊겼다. 아무리 투지가 사그라질 줄 모르더라도 생명이 스러지면 끝이었다.
잃고, 잃고, 또 잃었다. 아아, 나는 무엇을 얼마나 더 상실해야만 하나. 세게 짓씹은 입술이 찢어져 피가 맺힌 채로, 나는 파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조금 전 한쪽 팔째로 주무장을 잃은 기체를 가지고서 무진장의 적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얼마 없었다.
“또……나는, 아무도……지키지 못하는 건가……!”
이윽고 무리를 이끌던 고사조마저 절망에 잡아먹히려 하고 있다.
그 또한 부하들을 잃은 참이다. 부대원의 신호가 하나씩 로스트될 때마다 검은 《게슈테르벤》의 발악은 기세가 죽어 갔다. 제 죽음보다도 무거운 절망이 그의 어깨에 차곡차곡 내려앉았으리라는 건 굳이 나의 힘으로 사고를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최저한의 생존본능에서 왔으리라.
하지만 아직이다. 아직, 그 생명이 꺼지지 않았다면. 입안에 감도는 비릿한 쇠 내음을 삼키고서, 나는 무거운 입을 겨우 열었다.
“아무도? 한심한 소리 하지 마!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겠어. 내가 살아 있어!”
“들리고 있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너도 나도, 이번에야말로 죽겠지.”
“나는 네게 절망을 허락하지 않았어, 베스너!”
“미안…….”
흐느낌처럼도 들리는 형편없는 사과를 중얼거리며 그의 기체는 망연자실이 무릎을 꿇어 버렸다. 그 맥없는 소리야말로 가장 아끼던 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전의를 잃어버린 자, 절망에 굴복한 자가 이곳에서 단 1초라도 살아 숨 쉴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마음이 죽은 빈 껍데기조차도 저 포학한 군세는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 퓨네럴1, 로스트. 통신파나 정신파가 닿는 범위에는 이제 어떤 우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어쩐지 조금 흐려진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을 망연히 살핀다.
네 마리 새가 추락한 자리에는 묘표라고도 해줄 수 없는 잔해가 널브러져 있다. 매캐한 연기로 자욱한 회색의 대기, 더 태울 것도 없어 사그라져 가는 불꽃이 수 놓인 강철과 콘크리트 파편과 잿더미의 산, 붉게 검게 뒤섞여 고인 피와 기름의 도랑. 이제 내 기체만이 간신히 서 있는 이 땅은 앞서 덧없이 스러져간 전사들의, 차마 무덤이라고 부르기에는 처참하리만치 모독적인 참상이었다. 폐허라는 말조차 상냥한 현세 지옥.
뭐가 ‘발키리’야. 문득, 어떤 경박한 남자가 내게 빗대었던 비유를 조소한다. 그저 허무하게 파멸에 물어뜯기고 버려진 망해의 산에서 대체 무엇을 발할라로 인도하라는 말이냐. 그 발할라조차도 무로 돌아갈 텐데. 머나먼 옛날 자신을 낳은 저 황금의 별이 그러했듯, 이대로는 이 푸른 별 또한 좀먹힌 끝에 멸망할 테지. 아니, 별 하나로 끝난다면 차라리 값싸다. 만일 세상 바깥에 도사린 「왕」 그 자체가 이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광활히 펼쳐진 우주는 그저 절대적인 파멸의 이치 앞에 무한히 원초의 어둠으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우주의 운명 따위 안중에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막 내가 그 옛날처럼 또다시 파멸의 군세에게 소중히 어루만져 온 것들을 잃었으며,
“또로구나……또, 다시.”
잃으려 한다는 사실이니까.
실로 치욕스럽기 그지없다. 척추 끝부터 마디마디마다 꼭꼭 눌러 담듯이 들어찬 분노가 목 위까지 들끓어 넘쳐, 악문 이 사이로 씹어 뱉는 듯한 으르렁거림을 자아낸다. 잘게 떨리고 있었을 어깨는, 점점 더 들썩임을 더해 간다. 안구가 뽑혀나갈 듯한 증오를 눌러 담은 눈으로 무수한 적을 쏘아본다.
“나한테서 무얼 더 가져갈 셈이지!?”
전신의 힘을 끌어모아, 폐를 쥐어짜고 성대를 긁어내는 비분강개를 토해내었다. 그런다 한들 의미 있는 대답 따위 돌아올 리도 없건만. 터뜨리지 않으면 도무지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절규는 외부로만 향하지 않는다. 저 자신을 구성하는 존재 그 자체에 녹아든 내면의 ‘신’에게, 나는 의문을 던진다. 들리십니까──
“나의 신이시여, 당신의 마지막 아이가 간원하건만, 이 모독의 극치 앞에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그랬지요. 결코 쉽게 힘을 빌려주는 일이 없지. 허나, 이것조차도 그저 견뎌야 할 시련이라면, 대체 그 뒤에는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
피를 토하고 내장이라도 뱉어낼 듯한 전신전령의 호소는 덧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무리 목놓아 부른들 신은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으니, 침묵이야말로 무엇보다 고통이었다.
설령 이제 와서 계시가 내리고 힘을 빌려준다 해도 전부 늦었건만. 잃은 것은 돌아오지 않는데. 닫혀버린 미래는 다시 열리지 않는데. 죽어 없어진 이는……살아나지 않는데. 홀로 남아 버둥거리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구나. 말라붙어 나올 줄도 모르는 눈물 대신 제 처지를 자조하는 헛웃음이 입에 걸렸다.
뭐가 고사조인가.
고해진 것은 자신들의 죽음이건만. 이래서야 마치, 굶주린 독수리 떼 앞에 내던져져 잡아먹힌 아기 새와 다를 바가 없는데.
무엇이 불사조란 말인가.
죽지 않는다는 맹신은 그저 환상. 세계는 어디까지나 가혹하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끝이거늘.
그러나 아무리 좌절스럽고 참담하더라도 전부 내려놓기에는 이르다. 절망이란 진정으로 아무것도 바랄 수 없을 때나 느껴 마땅한 것. 나는, 아직 절망하지는 않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는 조종간을 고쳐 쥔다. 손상은 심하지만, 기체는 아직 움직인다.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다. 그것이 아무리 덧없고도 미약한 발악이라 해도. 총신이 부러져 둔기로조차 쓸 수 없게 된 탄약 없는 라이플을 내던지고 아무렇게나 잡히는 대로 묵직한 쇳덩어리를 주워들고서 수백, 수천,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를 무진장의 군세를 마주한다.
분명, 승리할 수는 없겠지. 이 지경까지 와서 삶을 자신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넘어 광기에 지나지 않겠지.
“좋아, 죽어 주지. 하지만……!”
맺음 없는 이야기에 가치가 없듯, 이 삶에 지금 반드시 종지부를 찍어야만 한다면, 나는 죽는 순간까지 너희를 죽이며 죽어갈 것이다. 설령 모든 것을 빼앗겼다 해서 절망에 긍지마저 잡아먹힌 적 없다. 생명이 끝나는 정도로 두려움에 떨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내가 여기서 죽어 넘어지더라도, 나는 이 육신이 썩어 문드러지는 독기로 너희를 좀먹을 것이고 부러진 뼛조각에는 찔린 너희의 피를 스며들게 하여 함께 삭으리라. 세상을 하직하는 길동무는 많을수록 유쾌하다.
자, 죽여댄 끝에는 죽음의 품으로 회귀하고 싶은 파멸의 종자들아. 바라는 바대로 너희에게 파멸을 선고해 주마.
나 또한, 이 목숨이 불타 재가 되는 순간까지 자랑스러운 고사조이니.
세상이 파멸하는 한이 있어도 이 긍지가 꺾이는 일은 없다.
◆
“……아, 지익……나, 느, 흐윽……!”
아이러니하게도, 티아나를 꿈의 밑바닥에서 끌어낸 것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갑갑함과 뇌수를 쪼개는 듯한 격통이었다.
미처 흩어지지 않은 분노를 동력으로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힘껏 들어 올리자, 현세 지옥과도 같던 참상은 온데간데가 없다. 사물다운 사물도 별로 없는 단출한 2인실에는 살풍경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는 듯, 빈 음료수 캔이나 마구 구겨진 과자봉지, 아무 페이지나 펼쳐진 채 널브러진 잡지 따위, 생활감 넘치는 룸메이트의 흔적이 간간이 널려 있다.
다 무너진 건물의 골조와 갈기갈기 찢겨 널린 시체와 사방에 흩어진 혈흔과 박살 난 기계의 잔해 따위는 없는 것이다.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부터 뱉으려 했지만, 대신 튀어나온 것은 억눌린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었다. 오한이 난폭하게 전신을 휘감는데 몸속은 혈액이라도 비등하듯이 뜨겁다. 멋대로 문이 열리는 소리 따위에는 잠시도 신경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흑……아, 하……아아아, 윽……!”
“티아나? ……이런.”
문을 연 장본인이 본 것은, 침대 위에서 둘 곳 없는 한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다른 손은 가슴께에 쥐어뜯듯이 얹은 채로 온몸을 경련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그저 가벼운 용건을 전하러 왔을 뿐인데 때아닌 봉변. 하지만 베스너 스커릿은 연인의 발작을 목도하고서도 안타까운 듯 짧게 한숨을 쉴 뿐, 결코 당황하지는 않았다. 침착하지만 빠르게 다가가 허우적거리는 손을 잡아 준다. 붙잡을 게 생기니 손톱까지 세워 말도 안 되게 억세게 쥐어 오는데도, 베스너는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대로 조심스레 붙잡힌 손을 끌어당겨서 티아나의 상체를 일으켜 제 품에 기대도록 하고는, 다른 한 손으로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발작이 가라앉을 때까지 끈기있게, 상냥하게. 몸에 익은 듯 능숙한 대응이었다.
“하아……후우…….”
티아나의 가쁘던 숨소리가 차츰 안정을 찾아 느릿해졌다. 떨리고는 있지만, 숨넘어갈 듯 몰아쉬던 조금 전에 비하면야 훨씬 나았다. 본인으로서는 정신도 못 차릴 만큼 심한 발작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니 차라리 상쾌한 것처럼도 느껴진다. 객관적으로는 여전히 형용하기 어려운 격통이 그 몸을 지배하고 있는데도.
설령 피부를 스치우는 공기조차 수억의 바늘 다발로 쓸어낸 듯이 쓰라리고 호흡할 때마다 독배를 들이킨 양 기도가 타들어 가고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아픔이 신경을 타고 전신 구석구석까지 전해지며 보이는 모든 물체가 서넛으로 겹쳐 보이는 시야에 현기증이 일 지언정, 소중히 여기던 것이 눈앞에서 하나하나 스러져 갈 때의 무력감보다는 낫지 않은가.
역시, 삶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죽음이라는 정체된 무보다는 가치 있다. 모두가 살아 있는 지금이 새삼 눈부시다.
조금 진정을 찾은 티아나가 고통 속에서 기묘한 안도감에 잠긴 사이, 베스너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역시 악몽을 꾼 거야?”
“악……몽, 꿈……그래, 꿈, 이었지. 하지만…….”
지금처럼 한낱 미물의 몸으로 ‘신’을 받아들인 반동이 찾아올 때마다, 악몽은 언제나 언제나 멋대로 반추되곤 했다. 그것 자체는 이제는 그러려니 할 만큼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티아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석연찮은 듯 중얼거리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번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수천 년 전의 과거에, 고향이었던 황금의 별에 찾아온 멸망의 지옥도를 되새기는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의 동료를 잃는다는,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멸망을 상상하는 악몽이었다. 요컨대──
“하……!”
변화한 꿈의 의미를 알아차린 티아나는 조소했다. 나는 이미 과거가 새긴 상처에 허덕이는 게 아니라 다가올지도 모르는 상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말인가. 웃기지도 않지. 나는 죽지 않고, 내가 보살피는 것들이 죽을 리가 없는데. 그건 지금 이 순간에도 성립하고 있는 명제인 것을. 악몽 속에서 죽음을 각오한 것은 그것이 꿈이 만들어낸 허구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허구라면 그 어떤 허무맹랑한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는 법이다.
티아나가 사색에 빠져 있는 동안 손수건을 꺼내 얼굴이나 손의 식은땀을 닦아 주던 베스너가, 갑자기 혼자 조소를 터뜨리는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음……꽤 인상 깊은 꿈이었나 보네.”
“시끄러워……. 너무 바보 같아서 우스웠을 뿐, 이야.”
순순히 인정하는 것도 짜증이 났으나, 부정도 할 수 없기에 티아나는 얼버무리듯 쏘아붙였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안심인걸.”
“별게 다 안심이네.”
“그야, 나는 하루하루 모두가 무사히 살아있는 걸 감사히 여기고 있으니까.”
“넌 지금……이게 무사해 보여?”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닌데…….”
내 앞에서 그런 아픔이 무사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고는 생각하지. 입 밖으로 냈다간 무시무시하게 신랄한 타박을 받을 법한 말을 삼키고는, 베스너는 입가를 긁으며 난처히 웃었다.
“베스너 주제에, 괘씸해.”
네깟 게 아무리 숨긴다 한들 손바닥 안인데.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아차린 황혼 색의 눈동자가 베스너를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딱히 아무 잘못이 없어도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고 없는 죄도 참회하고 싶어져야 할 시선이, 지금은 역시 힘이 없었다.
“그래, 그래. 그럼 괘씸한 김에 조금만 더 괘씸하도록 할게.”
몸살이라도 걸린 양 불덩이 같은 이마에 손을 가져간 베스너가 눈썹을 실룩이더니만, 그대로 티아나의 등 뒤를 받쳐 부드럽게 다시 침대에 눕혔다. 정말로, 베스너 주제에 괘씸하리만치 대범해졌구나. 티아나는 미간을 좁혔지만, 온몸이 욱신거리는 데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기력도 없기에 내버려 두었다. 어쨌든 그의 보살핌이 지금은 편한 것도 사실이겠다, 굳이 호의를 내칠 필요까지는 없겠지.
티아나의 표정이 한결 편해진 것을 본 베스너의 표정에도 조금 더 안도하는 기색이 서렸다.
“어때, 다시 잘래?”
“싫어. 불쾌할 뿐이야.”
“음, 그럼 여기 있을까? 심심하지 않게.”
“……어지간히, 한가한 모양이지?”
“그렇군. 한가한 모양이야. 그러니 한가한 종에게 일거리를 베풀어 줬으면 하는데.”
티아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그 시선을 한순간 베스너의 손으로 향했다가 거두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켜보던 베스너의 손끝이 움찔했다. 아, 조금 주제넘었으려나?
“심부름꾼으로서라면……체재를 허가하겠어.”
“명을 받듭니다.”
베스너는 쓰게 웃으면서 윗사람의 명을 받드는 시종인 양 그럴싸한 동작으로 손을 제 가슴께로 가져가며 고개를 숙였다. 군의 계급은 자신 쪽이 위라는 건 이미 작전 외 상황에서는 신경도 안 쓰게 된 지 오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경이 쓰였다. 여느 때와 같이 오만한 대답이 돌아왔음에 안도해야 할 텐데, 어째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다. 애초에 평소라면 수발도 됐다며 마다했을 성격이, 불쾌해서 대놓고 자기 싫다고 할 만큼 솔직해져 있는 걸 보아하니 오늘은 특히 질이 나쁜 꿈이었던 모양이다.
실은, 꿈의 내용을 왠지 알 것 같았다. 귀신같은 통찰력이 무색하게도 티아나의 마음만큼은 늘 틀리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베스너는 확신을 품었다. 틀리지 않을 자신마저 있었다.
‘어쩌면……아니, 분명 나와 같은 거겠지.’
왜냐하면, 자신 또한 그랬으니까.
지난 최악의 기억을 고스란히 재생하는 악몽은 늘 그를 괴롭히곤 했다. 제 무능함을 늘 자책하고 후회하며 이미 새겨진 상처를 채찍질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가끔 현재를 함께하는 동료들이 악몽 속에서 괴멸해가는 광경을 본다. 과거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보다도 앞으로 생겨날 상처를 상상하는 쪽이 더 아프고 비참할 수 있다는 걸 싫어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티아나의 저 강인한 척하는 표정 아래 숨겨진 불안은, 그런, 최악의 미래로 얼룩진 악몽을 꾸고 난 뒤의 자신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과 놀랍도록 닮은 색을 띠고 있다는 게,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였다. 물론 추태로 얼룩진 자신과는 달리 그 아름다움만은 빛이 바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양지차일 테다. 모르긴 몰라도 형편없는 절망을 질질 끌다가 깨어나는 자신과 달리 끝까지 고결한 긍지를 결코 잃지 않았겠지.
‘그렇지만…….’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로 요철처럼 다른데도 악몽만은 같다니. 베스너는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하는 척 티아나에게 보이지 않도록 심란한 표정을 띠었다. 제 손등에 깊고 둥글게 찍혀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손톱자국 따위보다도, 자신과 비슷한 것을 보았을 연인의 악몽 쪽이 가슴 아팠다.
같은 것을 바라보는 눈, 같은 곳으로 날개짓하는 날개.
우리는 같은 게 두려워 악몽마저도 공유하는 비익조와도 같구나.
하지만 이런 동질감보다는 악몽 따위 꾸지 않는 편이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