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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은 햇빛이 창살을 비집고 들어와 눈을 간질였다. 뒤척이며 눈을 가리던 그는 제 팔에 걸치는 따끈한 온기에 자연스레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바르작대는 느낌과 얕게 들리는 숨소리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일어났나?”


 품 안에서 바르작대고 몸을 비틀던 그는 이내 기지개를 피고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 나으리.”

 그가 제 얼굴을 끌어안고 살짝 부비는 듯한 행동에 대응해주듯 더욱 깊게 끌어안고는 요를 덮어주었다. 시기상으로 한겨울이었지만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선선한 바람이 계절의 착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가지말라는 듯이 제 옷깃을 잡은 그의 손을 살짝 힘주어 떼어내고는 방을 나섰다.

 “일어나셨습니까 나으리.”

 저를 보고 인사하는 식솔들에게 간단히 눈짓을 건네고는 그대로 화단으로 향했다. 어제 밤까지도 꾹 다문 꽃망울을 보여주던 동백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아름답네요. 그죠?”

 어느새 일어났는지 제 팔을 잡고 슬쩍 기대오는 그의 몸짓에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몸을 비틀며 말했다.

 “그래. 너가 잘 관리한 덕분이겠지. 안그런가?”

 “나으리도 돌봐주셨으니 더욱 환하게 피었겠지요.”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같이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는 환하게 핀 동백꽃을 하나 뽑아내듯이 꺾고는 자연스레 입에 물었다.

 “이르케 하믄 달커마 마시 남니다. (이렇게 하면 달콤한 맛이 납니다)”

 붉은 입술에 붉은 동백을 물고는 새뜻하게 웃는 모습에 새삼스레 가슴이 다시 떨려오는 그는 조용히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아직 그의 입술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동백을 뺐어들고는 자연스레 제 입에 물었다.

 “그래, 달콤한 맛이 나는구나.”

 “이미 꿀은 제가 다 먹었으니 어떤 것이 달콤한 맛을 내는지 저도 궁금해집니다, 나으리.”

 샐쭉 웃으며 제 말에 답하는 그를 보며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를 쳐다보는 사이 담장 너머로 사람들의 웃음 소리와 흔들거리는 등을 보자 오늘이 무슨 날인지 다시 떠올랐다. 팔관회라.. 그는 본디 소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저 파진찬이란 이름으로 자리만 지키고 있다 돌아오는 일 밖에 하지 않았으나, 그는 제 성향과 다른 지 장에서 축제란 얘기를 듣고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제게 말했었던 기억이 났다.

 “오늘 같이 팔관회에 가기로 한 것은 기억하는가.”

 한참이나 꽃을 감상하고 있던 그는 밝게 웃으면서 저를 보았다.

 “네! 그럼요. 나으리. 아까부터 언제 그 말이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능청스럽게 대답하고는 제 손을 잡아 빨리 준비하자고 이끄는 그를 보자 다시 한번 웃음이 비져나왔다. 몹시 기대 하는 듯 제 팔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감을 느끼고 작은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들었다. 살짝씩 팔을 흔들면서 저를 이끄는 모습이 오늘은 매우 길게 밖에 있다 다시 돌아올거란 예감이 들어 조금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그리도 기쁜가 너는.”

 “네. 누구와 같이 가는 축제인데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럼 나가 무엇을 할지도 생각해 두었던가 시아야.”

 “즐길 것입니다. 축제날이니 모두가 같이 즐길 수 있겠지요. 맛있는 것도 먹고, 사람도 구경하고 그렇게.”

 저를 바라보며 살풋 웃는 모습에 어떤 뒷말이 숨겨져 있는지 깨닫고는 눈을 피했다. 너가 재밌다면 되었다 살짝 뇌까리고는 웃는 그의 이마에 약하게 입술을 맞대었다.

 “그래. 그럼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라.”

 

***

 

 “나으리, 저기 보세요!”

 신이 나서 제 팔을 잡아 끌며 잰걸음으로 시장통을 누비고 다니는 시아의 모습에 그는 그저 따라가는 것 조차 벅찼다. 연신 사람들 사이를 재치며 여기저기로 빠지는 통에 행여나 누군가와 부딪혀 생채기라도 생길까 싶어 그의 어깨를 감싸며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겼다. 천천히 가자는 얘기에 붕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여 놓고는 막상 나오자 약속은 깡그리 잊은 듯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축제를 진심으로 즐기는 그의 모습이 그저 너무 이뻐서 저까지 정신을 빼앗기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다음엔 뭘 또 보고싶느냐?”

 제 질문에 그는 살짝 고민을 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활짝 웃으며 답했다.

 “향등과 가무백희를 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봤었을 때도 정말 아름다웠기에 또 보고싶습니다. 라고 조용이 읊조리듯 말하는 뒷말에 무언가 가슴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저를 쳐다보며 나으리 하고 부르는 그의 모습에 죄책감인지 미안함인지 모를 감정이 솟구쳐 올랐으나 애써 이를 무시하고는 웃음을 띄웠다.

 “그래, 가자. 보고싶다면 봐야지.”

 하지만 궁중 안에서만 이뤄지는 행사라 볼 방도가 없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어찌 보게 해주실겁니까.하며 작게 웃는 모습이 더욱 가슴을 아려오게 했다. 그러나 물어 본 것은 저이고, 콕 찝어 그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으니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근처에서 향등을 하나 사서는 팔에 걸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내, 그걸 볼 수 있는 곳을 안다. 가보자꾸나.” 

 당신이 어떻게? 라는 듯한 그의 멍청한 표정에 웃으며 그의 팔을 이끌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저가 그를 이끌며 빠르게 일파를 벗어났다.

 “조용하군” 

 급히 말을 빌려 예전에 눈여겨 보았던 한적한 정자까지 그를 이끌었다. 조용하고 고요한 정취의 암자였다.

 “자, 이리 와. 곧 공연이 시작하곘네” 

 늦지 않게 봐야할 것 아닌가.

 웃으면서 그를 쳐다보자 지금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찌푸리면서도 제 손을 잡았다. 두루마기를 벗어 단촐한 자리를 만들어 준 뒤, 향등을 옆에 걸었다.

 “이러면 되었군.”

 “뭐가 되었단 말씀인가요 나으리. 여긴 그저 암자일 뿐입니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와 짜증이 조금 섞인 표정이 그의 심정을 십분 대변해주었다. 그런 모습에 왠지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소리 내 웃자 제 말이 잘못되었냐며 성질을 내었다.

 “아니. 너의 말이 맞다. 가무백희는 볼 수 없으니, 내 다른 것이라도 보여주려고.”

 그러곤 칼을 꺼내 들었다.

 “춤을 배워 본적은 없으니 잘하지는 못하나, 그래도 내 춤사위라면 가무백희보다 더 보기 힘든 것 아니냐?”

 천천히, 부드럽게. 춤이라고는 일평생 배워보고 행해본 적이 없으나 그간 바왔던 검무와 춤사위들을 머릿속에서 한데 묶어 최대한 그럴 듯 하게 칼을 놀렸다. 직위에 오른 뒤에는 화랑이었을 때만큼 검을 많이 쥐진 않았으나 몸은 기억하고 있었는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움직여주었다. 빠르고, 화려하게. 그가 눈을 떼지 못하도록. 장단이라곤 풀벌레 소리와 제 숨소리 밖에 없으나 점점 발놀림과 몸을 빨리 해 화려함을 더했다.

쿵. 마지막 발을 내딛은 후 천천히 다시 칼을 넣었다.

 

 “어떻느냐?”

 

 내 춤사위로는 부족한가? 하는 뒷 물음을 감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새 멍하던 표정을 지운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같이 춤사위에 끼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까이와 제 칼을 빼앗았다.

 

 “잘하셨으나 완벽하진 못하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시범을 보여야겠군요.”

 

 그는 웃으면서 제 칼을 들더니 이내 정색을 하고는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작게 중얼거리고는춤을 시작했다. 빠르고 부드러우며 자연스럽게. 화려하게. 춤에 붙을 수 있는 온갖 아름다운 미사어구를 다 가져다 붙인다 해도 모자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샌가 칼은 누고 몸짓으로만 춤을 추며 저를 힐긋힐긋 바라보며 눈짓 하는 모습에 거절할 생각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빛이라곤 달빛과 향등 뿐이었으나 그조차도 그들에겐 너무 밝았다. 어떤 춤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추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서로의 손을 잡고 이마를 맞대고 입술을 스치며 눈빛을 얽었다. 재밌다는 듯 작게 터지는 웃음소리와 탄성소리가 간간히 흘러나왔다.

 

***

 

 

 휙,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쥐었다. 꽉 쥔 주먹이 놓지지 않겠다는 듯 힘을 더해갔으나 손 안에 들은들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손아귀가 잠결인 그를 현실로 빠르게 잡아당겼다.

 

 “헉…”

 

 그가 빠르게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조용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급히 오른손으로 침대 옆을 훑었으나 차가운 냉기만 흘렀다. 급히 침상을 빠져나가 문을 열자 어렴풋이 빛나는 달빛과 이미 꽃은 져버린 채 시들어가는 화단이 보였다.

 귓가에 나으리.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그저 저의 환청이었던 것을. 제 옆에 온기가 있을 것이란 믿음도 그저 헛되었던 것을 그는 알았다. 새삼스럽게 덮쳐오는 현실이 무섭고 두려워졌다. 한번 꿈에 나와줬으면 좋으련만이란 생각은 깨어날 때마다 후회하게 만들었다. 꿈이 행복할수록, 아름다울수록, 시아가 더 환하게 웃을수록 일어났을 땐 더욱 괴로웠다. 차마 다 잊고 지우자고 생각할 수 없는 추억들이라 그저 꿈에 나타나지 않게, 나타나더라도 항상 저를 원망하며 괴롭히라고 빌었으나 그녀는 항상 그의 기대를 저버렸었다. 오늘도 그랬다.

 방금까지 따뜻했던 달빛은 시리고, 장단을 맞춰주던 풀벌레 소리는 곡소리 같았다.

 지독한 악몽을 꾼 밤이었다.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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