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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험가 아르카나 진입 이전 시점

 루시드는 레헬른을 세울 때부터 위태로워 보였다. 레헬른을 세우고 나서부터 그녀는 시계탑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검푸른 비단 같은 하늘에는 형형색색의 폭죽이 쉬지 않고 터졌고, 시계탑 아래로 보이는 레헬른 무도회장에서는 최고급 와인과 알록달록한 디저트들로 가득한 호화로운 파티가 끝없이 이어졌다. 시장은 6만 번이 넘게 열리는 중인 푸드파이트 대회와 도망 다니는 닭들을 잡는 소란 따위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끌벅적했다. 시계탑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루시드 혼자서만 이 도시와 어울리지 않게 고요했다.

 “기껏 만들었으면 즐기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인형들과 노는 건 취미가 아니거든요.”

 소리 없이 다가온 단테는 루시드의 어깨에 턱을 살포시 기대었다. 루시드는 놀라지 않고 자연스레 대꾸했다. 단테의 등장이 익숙한 듯했다. 단테는 루시드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입술을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저 방금 파티장 다녀왔는데요.”

 “어머, 그래요? 당신에게 그런 취미가 있는지는 몰랐네요.”

 단테는 그녀에게서 원하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루시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단테가 종종 찾아올 때마다 루시드는 늘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시계탑 발코니에 기대 있거나 꼭대기에 앉아 있었지만, 눈그늘이 짙게 내려온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레헬른을 유지하는 일만으로도 대단히 많은 힘이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날, 대적자에게 패배한 날 이후부터 루시드는 자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단순히 잠이 많아진 게 아니었다. 수하들이 그녀를 놔주지 않아, 깊은 악몽에 먹혀가는 것이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루시드는 단테가 오기 전에는 어떻게든 깨어났지만,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보던 단테가 그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단테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늘 찾아가는 시간을 정확히 맞춰 레헬른으로 왔다. 자신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루시드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시계탑의 계단길은 웬일인지 클리너와 클리너의 수가 줄어 휑한 느낌이었지만, 모험가가 처리한 흔적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걸음을 서둘렀다.

 단테는 시계탑 4층과 5층 사이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시계탑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지만, 루시드의 방으로 사용되는 그곳은 있는 외부인이 마음대로 들락날락하지 못하도록 숨겨져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마주한 것은 깨진 와인잔과 그것을 짚고 일어나려는 루시드였다.

 “루시드, 이게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루시드는 단테의 부축을 거절했다. 그녀는 혼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금색 줄무늬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보라색 소파로 걸어가다 결국 몇 걸음 못 딛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베인 상처에서는 피가 떨어졌다. 안색이 창백했다. 단테의 낯빛도 따라 어두워졌다. 루시드.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지만 루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시드는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하며 중얼거렸다.

 “위대하신 그분의 마음을 어서 돌려야 해요.”

 조급함이 묻어 있는 혼잣말이었다. 단테는 일어나려고 하는 루시드를 잡아당기며 막았다. 루시드는 일어나지 못하고 무력하게 단테의 품에 안겼다. 루시드, 이제 그만 해요. 다 끝났어요. 대적자는 이미 강 하류로 가버렸단 말이에요! 단테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과는 다르게, 격앙된 어조였다. 루시드는 천천히 주먹을 꾹 쥐었다. 손톱에도 피가 물들었다.

 “잠깐 잠이 든 것뿐이에요.”

 “악몽에 잡아먹히고 있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루시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이었다. 괜찮아요, 검은 마법사님의 마음을 돌릴 때까지는, 온 천지를 달콤한 꿈으로 뒤덮기 전까지는. 단테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번에도 한 이야기였다. 루시드는 자신이 거듭해서 기계적으로 그 말을 읊조리는지도 모른 채로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했다.

 

 “……우선 손부터 치료해요.”

 “……그래요.”

* * *

 

 단테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레헬른에 도착했다. 저번에 꿈에서 겨우 깨는 루시드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시계탑의 계단은 클리너도, 가고일도, 모험가 그 아무것도 없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막했다. 까만 구두굽이 따각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벌써 늦은 거면 어떡하지, 루시드가 거절해도 옆에 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단테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각질이 뜯겨 나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급하게 도착한 발코니에는 눈을 감고 파리하게 질려 있는 루시드가 있었다. 단테는 바닥에 쓰러진 루시드를 자신의 품에 기대게 하고선 몇 번이고 흔들었다. 루시드는 그의 손짓에 따라 힘없이 흔들렸다. 루시드, 루시드!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지만 가쁜 숨을 내쉴 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도통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몽환 공간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완전히 잠식되어 악몽이 된 게 분명했다. 단테는 흔들어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울퉁불퉁해 예쁘지 않은 입술을 깨물었다. 단테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몽환 공간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 * *

 

 “당장 날 여기서 꺼내요, 아직이라고 했잖아요!”

 “시간을 많이 드리지 않았습니까, 주인님. 케케.”

 “당신들은 내가 만들어낸 존재예요! 내 말을 들어야 하잖아!”

 “크큭. 언제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할 겁니까? 이젠 정말 저희가 모실 겁니다. 얼른 움직여!”

 루시드는 자신의 수하 여럿에게 붙들려 마구 악을 써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루시드를 자꾸만 약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수하들은 주인님, 주인님 하고 말은 높였지만, 말투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어조에 가까웠다.

 그때, 어디선가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루시드와 그녀가 만들어낸 존재가 아닌 것이 들어올 수 없는 몽환 공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수하들은 이리저리 둘러봤다.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어둠뿐이었다. 소리가 나올 만한 데가 없었고, 특별히 다른 부분도 없었다. 그들은 다시 루시드를 압박해 왔고, 그 순간 위에서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드!”

 몽환 공간의 일부분이 깨지며 카랑카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테였다. 난데없이 나타난 단테에 루시드의 눈이 커졌다. 수하들이 단테가 나타난 쪽으로 시선을 돌려 누구냐며 경계하기도 전에 단테가 수하들을 없애버렸다. 루시드의 꿈에 간섭할 수 있는 단테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왜 위대하신 그분의 뜻을 나한테까지 숨겨요? 내가 배신할 사람으로 보여요?”

 “…….”

 “그분은 뜻을 안 굽히실 거예요. 잘 알잖아요.”

 단테도 루시드가 본 미래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미래의 문을 꾸며 연합을 와해하려던 루시드가 갑자기 레헬른을 세운 것을 보고 지레짐작한 것뿐이었지만 정답이 맞았다. 루시드는 계속해서 부정해왔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검은 마법사는 모든 걸 없앨 생각이었다. 연합은 물론 군단장들과 검은 마법사 자신조차도. 단테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나를 구원했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예요.”

 답지 않게 애절한 목소리로 말한 단테는 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뜻이었다. 루시드는 망설였다. 끝나지 않는 악몽에 갇혀 있을 수도 없었고, 단테의 손을 잡고 현실을 마주하기도 두려웠다. 그녀가 손을 잡기를 기다리던 단테는 참지 못하고 먼저 손을 붙잡았다. 얼음장같이 차갑던 루시드의 손에 온기가 닿았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해요. 뭐든 간 악몽보다는 나을 거야. 나는 늘 루시드 편이니까.”

 지독하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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