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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는 울음소리.

 

 디아즈는 뻐근한 감각과 함께 눈을 떴다. 오랜 시간을 잠들었으나 개운한 곳이 없었다. 눈동자가 어렴풋이 시큰거린다. 이번에도 같은 꿈이었다. 비슷한 꿈을 꾼 지 몇 주는 더 되었지만, 그런 날마다 매번 묘한 불쾌감에 휩싸인 채 정신이 들곤 했다. 차라리 익숙해지는 편이 좋으련만. 여전히 뇌의 어딘가를 헤매는 울음소리를 지우려 귀를 문지르던 디아즈는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내었다. 하얀 절벽에 드문히 솟은 침엽수림, 그 너머로 검푸른 바다. 바다, 파도, 물결이 거칠게 마찰하여 빚어내는 흰 물거품.

 칼리브 아일랜드의 이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필연적으로 생각나는 이가 있었다. 거센 파도보다도 강하고, 다부진, 지독히도 다정한 사람. 두려워 마. 머릿속을 맴도는 상냥한 목소리에 여태 뇌리를 헤집던 울음소리가 들러붙는다. 비통한 울음. 그리고 다시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두 소리가 혼란스레 섞이고, 서서히 빨라져, 휘몰아치면, 디아즈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툭, 부딪친 소리가 추락하여 파도 사이로 자취를 감춘다. 디아즈는 멍하니 파도가 향하는 곳을, 물결이 모든 것을 으깨고 파괴하여, 마침내 집어삼키는 과정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

 

 "조금 늦었네?"

 "죄송합니다."

 "아니, 탓하려는 뜻은 없었어. 무슨 일 있나 해서."

 

 이어지는 대답이 없자, 유페리아는 건네줄 서류를 갈무리하던 손을 멈추고 제 앞에 선 이를 올려보았다. 디아즈는 시선이 닿자 황급히 눈을 돌렸다. 종착지를 찾지 못해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가 곧 작은 목소리와 함께 아래로 향한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하는 얼굴에는 외양만큼이나 반듯한 글씨로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라 쓰여 있었다. 디아즈가 타인에게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테룬칼리브의 모두가 공연히 알고 있다고 해도, 역시 노골적이다, 유페리아는 생각한다. 짧은 고민 끝에 그녀는 말을 얹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가 보지, 그런 일을 부러 캐내고야 마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질문 대신 가지런히 정돈된 서류철을 내밀 무렵, 집무실의 문이 가볍게 울린다. 똑똑.

 

 "유페리아."

 "…이슈라님?"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디아즈는 온몸으로 불편한 티를 내기 시작했다. 집무실의 문을 부드럽게 열고 들어선 이슈라의 손에는 서류 몇 장이 들려 있었다. 고작 저 종이를 전해주러 걸음 한 것이 틀림없다. 하기야, 그래, 이디트도 제 스승의 다정함에 대해 한참을 자랑하곤 했으니까. 그렇다 한들 디아즈의 눈에는 마냥 곱지 않게만 보였다. 유페리아가 이슈라의 앞에서는 유독 눈을 많이 깜박이는 탓이다. 그리고 초조해 보였다. 그런 유페리아는 싫지 않았다. 그녀를 그렇게 만들고야 마는 이슈라 쪽이 싫었다. 유페리아가 꼭, 그녀 앞의 자신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유일한 상대가 이슈라라는 사실 또한 그랬다. 이슈라가 제 쪽을 보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인사를 건넨다. "디아즈로구나, 잘 지내느냐?" 디아즈는 말없이 찡그린 표정 그대로 이슈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그저 웃었다.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짧게 숨을 들이킨다.

 전기가 흐르듯 위화감이 뇌리를 찔렀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었다. 이슈라, 유페리아님, 그리고 제 사소한 질투. 생소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 생각한 순간 눈앞에 녹색 빛이 튄다. 숲이다. 시야를 스쳐 지나간 광경은, 그래. 숲이었다. 칼리브 아일랜드와는 달리 활엽수로 가득한 푸르른 숲, 쬐어 내려오는 빛, 꽃잎과 함께 흐르는 샘물…. 푸른빛의 투명한 장막에 둘러싸인 사람. 그리고 누군가 그 장막에 다가서지도 못한 채 잔디 위에 쓰러져 울고 있었다.

 누가?

 어김없이, 들려오는 흐느끼는 울음소리.

 

 디아즈는 유페리아가 제 팔을 흔들었을 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하는 순간 내내 참았던 숨이 어렵게 터져 나왔다. 꿈이었다. 안개가 낀 것마냥 눅진한 녹빛이 눈꺼풀 밑에 엉겨 붙는다. 순식간에 두통이 몰려온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봐요, 의무반에 데려가는 것이 좋겠구나, 귓가에 울리던 대화소리가 한참을 맴돌다 끝내 흐려진다. 힘겨이 고개를 젓자 다시 폭력적인 통증. 디아즈는 제 이마를 누르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여전히 시야는 탁했지만, 누가 이슈라고 누가 유페리아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힘들 땐 힘들다고 해도 돼."

 "……."

 

 상냥한 말이다. 디아즈는 흐린 시야 사이로 유페리아를 바라보았다. 문득 제 스승에게 처음으로 그녀에 대해 물었던 날이 떠오른다. 홀로 몇 번이고 곱씹었던 기억의 조각이다. 아라자드 단장님의 제자 중 손에 꼽히는 아이지, 부드럽다기보단 까칠하고, 전사 같은 성격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유페리아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디아즈는 그 다정함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좋아했다. 그녀의 친절이 얼마나 무겁고 드문지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비밀을 품은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저 혼자서 침잠하고 싶은 비밀.

 그러니까, 바다였다. 디아즈는 유페리아를 만난 날부터 칼리브 아일랜드를 둘러싼 푸른 물결을 사랑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독식할 것처럼 매섭게 몰아치고, 그에 닿는 세상의 모든 것이 속수무책으로 바스라지는 물결을. 강하고 다부진 파도 아래는 그저 심해 같은, 고요한, 다정함뿐이라는 사실을. 그 굳셈과 다정이 영원할 것이었기에, 그리하여 디아즈는, 파도와, 심해와, 그들의 주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해 마지않았다.

 

*

 

 의무실에 있는 간이침대의 매트리스는 딱딱하고 등이 배겼다. 저는 괜찮다고 수 번을 말했으나 이슈라와 유페리아는 기어코 그를 의무반에 넘겨주었다. 의무반은 디아즈를 친절하게 안쪽 침대로 안내하더니, 이슈라와 유페리아가 돌아가자 떨떠름한 얼굴로 별말 없이 자리를 떴다. 애초에 이디트나 유페리아, 이슈라를 제외한 테룬칼리브의 구성원 대부분은 디아즈를 불편해했다. 그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의무반의 조치 없이도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면 금방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디아즈는 멀뚱히 천장을 올려 보았다.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진한 녹색의 잉크가 번진다. 눈꺼풀을 덮는 순간 그 색깔은 빠르게 퍼져 뇌를 잠식하고, 또다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정신을 할퀼 테다. 멍하니 떠올린다, 몰아치는 물결이 이 생명의 빛을 걷어가 준다면 좋을 것이라. 물의 흐름에 가라앉아 숨을 죽이면 생에 존재하는 온갖 해害가 쓸려 나갈 것 같았다. 잔득이 남아 끈적이는 흐느낌 또한 함께 흘러나가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디아즈에게 유페리아란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강경함과 또 대비되는 상냥함을 애정해버렸음에 어쩔 수 없겠지만, 그는 유페리아가 아주 단단하고 견고한 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부러 부정하려는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다. 두려워 마, 내가 너희를 지켜줄게. 참으로 깊은 각오를 품은 듯한 온기 있는 목소리. 또 울음소리. 오래도록 품어 온 신망이 갈라지는 감각이 든다. 혀끝이 쓰다. 디아즈는 숨을 들이켜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암전.

 

 …….

 푸른 숲.

 그 안에 서 있었다.

 그는 몇 주를 부정하고 외면했던 악몽의 풍경을 이제 와 시계視界에 담는다. 맑은 연둣빛으로 만개한 활엽수와 그 사이로 비추어 내리는 따스한 햇빛. 끔직이도 피하고 싶었던 흐느끼는 울음소리. 자신이 사랑했던, 또 사랑하는, 다부진 파도가 그것을 쓸어낼 수 없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디아즈는 걸음을 딛는다. 푸른빛 장막과 저 멀리 쓰러져 울고 있는 이에게, 비로소 그 앞에 다가선다. 무심코 생각한다. '심해에… 파도 아래 있던 것은 고요가 아니었지.'

 물살이 세상을 헤집는 소리였을 것이다. 굳센 파도 아래에서는, 그 물결이 마찰하는 소리가 온 바다를 진동하여 울리고 있었다. 비명과도 같이. 그러나 그것도 바다의 것이었다. 장막 앞에 선 디아즈는 고개를 들었다. 영원을 잠든 듯한 평화로운 푸른 공간, 고요히 눈을 감은 사람이 있다. 디아즈는 소리 없이 그 이름을 되뇌인다, 이슈라. 꿈의 광경이 어떤 기억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슈라가 어찌하여 생명의 기운이 넘실대는 숲에 잠들어 있는지 또한 알 수 없다.

 추측은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것들의 내용은 썩 달갑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에게 향했다. 자책과 죄악감에 휩싸여 그저 비통 속에 잠겨 있을 뿐인, 디아즈의 바다. 유페리아는 울고 있었다.

 누구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무엇보다도 다부진 사람이.

 그리고 흐느끼는 울음소리. 비명에 가까운 애통의 소리.

 

 악몽이구나, 생각한다.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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