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콤한 꿈이니 씁쓸한 웃음이니 하는 단어들처럼, 만약 악몽에도 맛이란 개념이 존재한다면 이건 어떤 맛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시도 세이기는 한밤중 그런 생각에 잠시 잠기며 익숙한 감촉의 이불을 걷어냈다. 그렇지 않아도 스멀스멀 가라앉는 기분을 축축한 침구가 아예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듯한 기분이었기에 충동에 따라 자연스럽게도 제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누가 깨게 된다면 미안할 것 같을 만큼이나 적막만이 감싸고 있는 서늘한 지금이 기숙사 안에서 자신의 묵직한 발소리만이 유독 크게 울렸다. 다행히도 이 무렵에 산책을 즐기는 녀석도, 잠에 쉬이 들지 못하고 방황하는 녀석도, 평소라면 샤워만 하고 자겠다며 버텼을 녀석도, 그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모두의 안면을 인식하고 나서야 새삼 바짝 말라붙은 입술이 묘하게 거슬렸다. 수분이 부족해 쩌억 달라붙는 느낌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침의 일정을 상기하며 물 한 잔만 마시고 도로 누워야겠다는 계획은,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새는 불빛으로 인해 가볍게 무너지고야 말았다.
“……지휘관 씨?”
지금 이 시각에 방문하는 건 방해가 아닐까? 같은 염려와 배려보다도 또 서류 사이에 파묻혀 책상에 고꾸라져 계시는 건 아닐까? 따위의 걱정과 불안이 앞섰다. 이전에 잠든 인원들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실례합니다. 그런 상투적인 말과 함께 노크를 곁들인 시도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 서류 더미와 커피잔을 옆자리로 밀치는 모습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일단 아무 데나 앉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감사합니다. 그게, 자다가 깨버리는 바람에. 기분전환 하는 김에 들렀습니다. 지휘관 씨는 또 야근입니까?”
“맞아. 이틀밖에 안 됐지만. 카가하라 씨가 급하게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어.”
쓴웃음과 더불어 눈 밑을 평소보다 더욱 짙게 물들이는 다크서클, 그리고 퍼석해진 검보랏빛 단발이 퍽 애처롭게 보였다. 침대 끄트머리에 방금 막 걸터앉은 시도의 거구가 앞쪽으로 약간 기울었음과 동시에 지휘관이라고 불린 호즈노미야의 손이 뻗어와 시도의 머리를 헝클었다. 어른이자 모두의 지휘관인 그녀가 보이는 여유였겠지만, 시도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촉매가 되어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식은땀에 애매하게 젖어 달라붙는 소매를 억지로 걷으면서까지 굳이 나서서 서류 더미 옆의 자료를 분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유독 종종 호즈노미야와 마주치며 일을 돕거나 여유 시간을 만들어 주던 시도에게 있어선 익숙한 작업이다.
팔락팔락 쌓이고 넘어가는 종잇장들 소리와 그 위를 사각사각 긁고 지나가는 펜 소리와 드문드문 들리는 커피 마시는 소리. 고요한 새벽이라 더욱 간지러운 소리 틈을 가로지른 건 호즈노미야의 목소리였다.
“생각해 보니 시도 군, 기분전환 하는 김에 온 거라고 했었지.”
“네. 잠깐 악몽을 꿔서요.”
“악몽? 어떤 내용?”
조금 전까지 줄곧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그 감각을 되살리는 건, 제아무리 최강 리더라 할지라도 그리 기꺼이 할 만한 행위는 아니었다. 잠시의 침묵을 빌리기는 했으나 그게 반드시 회피로 이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그녀는 그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짧은 묵념과 침잠하는 그의 눈길을 애써 모른 척해주었다.
“……우연히 만나서 함께 성묘하러 가주셨던 날, 혹시 기억하십니까?”
“…아. 그때의‘친구’ 이야기?”
“네. 그 친구입니다.”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새 잔을 정중하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미지근하게 데워진 우유가 든 그 잔을, 그는 한참을 엄지로 애틋하게 쓸었다. 마치 그 잔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친구의 마지막 온기라도 대신하는 것처럼.
“전 이제 더는, 그때처럼 친구를 영원히 잃게 되는 일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최근 구급상자 속 내용물이 줄어드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고 아시다시피 이터의 출현도 싸우게 되는 빈도도 늘어가고만 있을 뿐이죠. 그래서 내심 많이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크게 다치는 꿈이라도 꾼 거야?”
“아뇨. ……저를 제외한 모두가 죽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모두의 시체 사이에서 혼자 울부짖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나도?”
“…네. 지휘관 씨, 당신도.”
가라앉은 메마른 목소리의 끝이 먹먹하게 젖어들어갔다. 그런 꿈을 꾸고서 고작 단순한 악몽으로 치부하고 재차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세계의 수호라는 이름의 무게와 스스로 짊어진 각오들과 변신과 싸움을 거듭할 때마다 감수해야 하는 위험, 그리고 그간의 경험이 알려준 상실에 대한 공포와 씁쓸함을 어찌 한순간이라도 잊을 수 있을까. 단번에 반 잔쯤 넘긴 미지근한 우유가 혀끝에서부터 시작해 가슴 정중앙까지 녹이는 듯한 감각에 새삼 길게 숨을 뱉으며 짧은 안정을 되찾은 시도를 달래러 온 것은, 손등을 불시에 감싼 부드럽고도 익숙한 온기였다.
“많이 불안했겠구나.”
“지휘관……호즈노미야 씨.”
하늘보다는 바다가 더 떠오를 만큼 깊고도 침착한 벽안에 비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얼굴은 ‘최강 리더’로서의 시도 세이기가 아닌, 그저 불안에 젖어 어른에게 응석을 부리는 일개 고교생일 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그를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 취급할 만큼 짓궂은 지휘관은 아니었기에 호즈노미야는 그저 다정하게 손등을 두어 번 두드려주는 걸로 무언의 위로를 대표로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이 제대로 입밖으로 나왔는지, 스스로 알 길은 없었다. 밀려오는 낯선 쑥스러움을 갈무리할 길이 없어 방황하는 시선을 그저 잔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뿐이었으므로. 문득 커피잔을 힘없이 빼앗긴 상황에 대해 수 초 늦게 인식한 순간, 눈에 비치던 풍경은 이미 뒤집히고 있었다.
“호, 호즈노미야 씨?”
익숙하고도 낯선 천장보다도 위에서부터 자신을 내려다보는 침착한 시선에 우선적으로 이끌렸다. 이대로 시간은 물론 호흡조차도 멈춰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 착각이 들 만큼의 긴장과 함께 아직 정체를 알지 못하는 두근거림에 시달리고 있을 즈음, 호즈노미야가 물러나 자리에서 일어나주었다.
“먼저 누워 있어.”
“예? 그, 같이 자자는 뜻입니까?”
“응. 금방 끝낼 거지만, 졸리게 되면 먼저 자도 괜찮아.”
“안 그래도 피곤하실 텐데 제가 도와드리지는 못할망정 폐를 끼칠 수는…….”
“난 괜찮아. 게다가, 나보단 너희가 더 항상 힘든데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평소라면 겸손과 사양으로 재빨리 일어나고도 남았을 테지만, 진심과 걱정이 가득 어린 다정함이란 걸 아는 이상 구태여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도는 그대로 호즈노미야가 덮어주는 이불을 이기지 못하는 척 순순히 덮으며 작게 뒤척였다. 누운 김에 휴식을 위해 안경을 벗고 나면 이제 책상을 비추는 불빛도 그녀의 뒷모습도 너무나도 흐리게 보였다. 다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존재감이 느껴진다는 것만으로도 이전까지의 불안은 종적을 감췄다.
---이불에서 풍기는 향기에 익숙해지고 나니 이제야 안도와 졸음이 양쪽 눈꺼풀을 지배했다. 시야만큼이나 가물가물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적어도 이번에 꾸게 될 꿈은 맛으로 비유하자면 솜사탕과도 같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확신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