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림 악몽 합작 : 이라x치카
치카의 하루는 항상 새벽에 끝이 났다. 수형자들도 잠들고 야간 경비를 서는 위병들만 몇몇 깨어있을 시간. 수형자들을 감시,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는 치카는 감옥을 가볍게 한 번씩 돌아보고 나서야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 특유의 찬 공기는 밤이 되어서는 더욱 더 차갑고 날카로워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그에게는 제법 혹독하게 느껴질 법한 온도였지만, 치카는 불평 하나 없이 제 옷을 여밀 뿐이었다. 이 정도 추위에는 익숙했다.
성의 정문을 지키는 위병에게 묵례한 치카는 소리 없이 나무를 타고 곧바로 2층 어느 방의 테라스로 향했다.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2층 테라스에 발을 디딘 치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새하얀 숨결이 밤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새하얀 그의 뺨과 콧등은 발갛게 물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테라스의 문손잡이를 짚은 치카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표정 없던 얼굴이 미묘한 빛을 비췄으나, 이내 문을 밀어 연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제 주인에게 고했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치카는 거리낄 것 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밤에는 바람이 한층 더 차가웠다. 혹시나 제 주인이 찬바람을 맞을까, 치카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두꺼운 커튼까지 내려 완전히 바람을 차단했다. 점점 추워지는 겨울에 대비해 그가 따로 주문 제작한 보람이 있게끔, 방으로 들어오던 옅은 달빛도 함께 가려졌다. 한 줌의 빛도 들지 않아 새카만 어둠 속을 익숙하게 움직여 제 주인이 있을 침대로 다가갔다.
치카는 마치 미리 준비되어있는 듯, 침대 옆에 부자연스럽게 놓여있는 1인용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협탁에 놓여있는 초에 불을 붙이자, 어둡던 방 안에 옅게 따뜻한 불빛이 자리했다. 옅은 불빛 속에서 그는 침대위에 누워있는 제 주인의 자는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여전히 고요하고 일정했다.
작은 촛불 하나지만, 밖에 있던 치카에게는 충분히 따뜻하고 포근했다. 추위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몸이 조금씩 풀어지면서 노곤한 기분도 들었다. 무덤덤하고 힘든 티를 잘 내지 않는 치카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피곤함에 짧게 하품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 주인의 명령으로 자리를 비울 수 없었으므로 치카는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온전히 등을 기댔다. 노곤함에 감기려는 눈을 굴려 잠들어있는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런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지만,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치카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소꿉친구 같은 존재였다. 처음 바스티가 데려왔던 작은 아이는 제 또래라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작고 말랐다. 바스티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던 손은 뼈마디가 두드러져 계절과 관계없이 몹시 추울 것 같아, 그 손을 잡아주고픈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는 유독 낯을 많이 가렸다. 바스티의 등 뒤에 딱 붙어서는 다른 시종들은 물론이고 바스티와 친한 왕자들에게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어렸던 이라는 그 사실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치카.”
이라는 바닥에 형편없이 널브러져 있는 아이의 몸을 잡아 흔들었다. 많아 봐야 9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먼지와 상처로 지저분했다. 그가 어릴 적, 이 아이를 처음 봤을 때 바스티에게 뭐라고 했더라.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아이는 그의 힘에 따라 몸이 조금 흔들릴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다급해진 이라는 아이를 내려놓고 옆에 있는 다른 아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조금 전의 아이보다는 몸집이 커지긴 했지만, 여전히 마르고 작은 아이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치카. 제발, 눈 좀 떠봐.”
이라는 아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힘없는 아이의 몸을 끌어안았다.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점차 절박한 빛을 띄웠다. 아이의 오른쪽 눈 위를 가로질러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깨끗한 청록색이었던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붉게 물들고 시간이 지날수록 까맣게 변해갔다. 까맣게 물들어가는 얼룩이 마치 자신을 비난한 것 같았다.
자신은 이 상처를 알고 있다. 이라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일깨워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이라는 대상 없는 누군가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 치카...”
처음으로, 제 손으로 타인을 다치게 한 일은 그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단 하루도 잊지 못했다. 그의 집안 대대로 내려왔던 분노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날따라, 새로 들어온 수형자들이 유독 질이 나빴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애썼던 이라지만, 그들이 아직 어렸던 이라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스티는 그 일을 사고라 했고, 치카는 실수라 했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라도 원치 않은 분노였고 이라는 그 분노를 참으려 애썼다. 나쁜 건 굳이 어린 왕자를 건드렸던 수형자들이었지만, 처음으로 손에 피를 묻혔던 이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분노에 집어삼켜진 그는 그 자리에 있던 나이프를 휘둘렀고 다른 이들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나이프에 피를 묻히고 말았다.
“치카... 제발...”
다만, 그 나이프에 묻은 것은 수형자들의 피가 아니었다. 수형자들의 앞을 막아선 작은 아이는 제 상처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눈 위를 가로지르는 생소한 고통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음소리가 이라의 분노를 잠재웠다. 정확히는 두려움이 그 분노의 위를 덮어 없앴다고 봐야 했다. 그것이 무엇을 향한 두려움인지 어린 왕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급하게 의사를 불러 치료했지만, 아이의 얼굴에는 사라지지 않을 흉터가 남았다. 이라는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이는 당신의 탓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며 어린 왕자를 위로했지만,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등에 지고 자신의 힘을 조절하는 데에 온 힘을 다했다.
“치카...”
찢어진 상처에서 나오던 피는 바닥을 물들이고 꿇어앉은 그의 무릎을 적실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아이의 머리카락 끝이 피에 조금씩 물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라는 급히 숨을 삼켰다.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지만, 시야는 금세 흐릿해졌다.
힘없이 안겨있던 아이가 문득 몸을 움츠렸다. 울음을 참으려 애쓰던 이라는 아이의 기척에 급히 고개를 들어, 안고 있던 아이를 살폈다. 움찔, 움찔, 몸을 떨던 아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려던 순간.
“왕자님.”
“...”
“이라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눈앞이 점멸하고 시야를 가득채운 심홍색에 이라는 눈을 크게 떴다. 걱정스런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안고 있던 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온 몸이 식은땀에 젖어있고 숨이 찼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축축함에, 이라는 잠옷 소매로 제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그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치카가 부산스레 이라의 상태를 살폈다. 피로에 잠시 눈을 붙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끙끙 앓는 소리에 눈을 뜬 그였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작게 발버둥치는 이라의 모습에 치카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를 깨우기로 다짐한 참이었다. 치카의 물음에도 이라는 숨을 고르느라 제대로 답하지도 못했다.
“...치카...”
“네, 왕자님. 여기 있습니다.”
이라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흘러나온 목소리는 잔뜩 잠기고 갈라져 있었다. 차게 식은 이라의 손을 제 양손으로 감싼 치카는 차분하게 그의 부름에 응했다. 이라는 제 손을 덮은 치카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자신이 봤던 손과는 확연하게 다른 크기였다. 그럴만했다. 꿈속의 아이는 지금의 그가 훨씬 어렸을 적 모습이었으니까.
치카에게 붙잡힌 한손을 내버려 둔 이라는 길게 숨을 내쉬며 베개에 고개를 문질렀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었지만, 이라도, 치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치카...”
“네, 왕자님.”
“계속... 여기 있을 거야?”
혼자 잠들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이라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치카에게 잡혀있는 손을 조심조심 움직여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차게 식은 손에 조금씩 온기가 돌았다. 잔뜩 불안해하는 기색이 담긴 목소리에, 치카는 아주 조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예, 왕자님이 잠들 때까지 계속 여기 있겠습니다.”
아. 맞아. 이라는 조금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담고 있는 심홍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두려움. 이라는 이 아이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