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땅이 무너지는 소리. 목이 베인 사람들이 육체가 무너지는 소리.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는 소리.
축축히 젖은 시야 사이로 네 마지막 모습이 보였다. 슈타인과 마리의 파장이 속 안에서부터 터져, 그들이 내려친 주먹에 갈기갈기 몸이 찢어지는 네 모습이 잔인하리만큼 선명히 보였다. 참으로 너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광기에 빠져,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너에게 적당하다 할 정도로 알맞은 최후였지만, 그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났다. 네가 가여워서는 아니었다. 너를 가여워하기엔 BJ의 죽음이 너무나 억울했고, 처형이란 이름의 학살을 당한 사무전 사람들이 불쌍했고, 부질없는 희망을 붙잡고 너를 따라다닌 내가 가여웠다. 내가 눈물을 흘린 건 나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기적인 이유였다.
희망으로 너를 따라다녔지만, 그것은 무너졌다. 나의 파트너, 멍청하리만큼 착했던 아리안나도 네 손에 잃었다. 나의 모든 것을 무너트린, 사랑스러웠던 너도 죽었다. 너와 함께했던 추억도 이제 흐려졌다. 눈물이 흐르고 입안이 텁텁했다. 부서진 모래시계를 손으로 쥐는 것처럼, 세어나간 것을 잡을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아리안나와 나의 피로 젖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추듯 쓸어내라며 눈물을 숨기려 했다. 천천히 눈을 쓸고, 앞을 응시하자 너가, 저스틴 로우가 나를 보며 음산히 웃고 있었다. 찢어발겨 진 몸뚱이를 두고, 머리 하나 남은 처참한 모습으로 나를 노려보며 찢어지게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당신 때문입니다”
원망하는 듯한 말투로,
“이 모든 건 당신 때문입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당신이 나를 망쳤어.”
나를 저주했다.
“당신이 나를 죽였어.”
너는, 울고 있었다.
*
“무슨 일 있나요, 마리아?”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리듯 정면을 응시했다. 작은 테이블이 여러 개 나열된 카페. 어젯밤 악몽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탓에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았던 것 같았다. 손끝에서는 아직 달의 서늘한 공기가 맴도는 듯했다. 애써 떨리는 손을 무시하며 눈앞의 너에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괜찮아.”
작게 내뱉은 말은 허공에서 흩어지듯 무의미하게 울렸다. 너는, 저스틴 로우는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다 떨리는 내 손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저스틴이 내 손을 잡아 제 입가에 가져가는 그때, 나는 그의 입에 난 흉터를 봤다. 한쪽 눈을 가린 안대도, 화상을 입은 듯 보이는 볼의 흉터도. 웃음이 났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가, 저스틴 로우가 광기에서 해방된 게 벌써 몇 해 전인데. 그 역겹고 끈적거리는 흔적을 잊은 것이 몇 달 전인데.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적이 일어나 네가 달에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를 믿는다, 함께 속죄하겠다 속삭인 자신이 아직 그 일을 악몽으로 되새기며 곱씹는 일은 참으로 우습고 우스운 일이었다.
너는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한쪽에 깊게 나 있는 흉터 탓인지, 닿은 감촉은 까끌까끌했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네 체온이 닿자, 악몽의 상흔마냥 떨리던 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불안도, 공포도, 자괴감이 봄바람에 눈이 녹듯 조용히 사라졌다. 자괴감에 지은 미소가 아닌, 기분 좋은 평온함에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너는 슬쩍 손등에서 입을 떼며 배시시 웃었고, 그 모습이 나는 귀엽고 좋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내 불안을 너에게 말했다.
“저스틴, 사실 나 오늘 악몽을 꿨어.”
“악몽이요? 어떤 식의...?”
“... 네가 광기에 잡혔을 때, 만약 돌아오지 않았다면... 하는 식의 악몽”
정말 기분 나쁘더라. 나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가볍게 몸을 떨었다. 너는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정말 기분 나쁜 악몽이네요. 너의 감상은 간단했다. 간결하고, 깔끔한 감상. 저와는 연관이 없다는 듯 단호히 말하며, 다정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네 모습에 안심했다. 맞아, 그 기분 나쁜 악몽은 너와는 연관이 없는 것이지. 너는 이리 돌아왔고, 지금 나와 작은 카페에 앉아 평화롭고 지루하게 대화나 하며 음료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고 있으니까. 내 악몽은 너와는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슬쩍 손을 뻗어 네 흉터를 손끝으로 더듬다가, 네 안대를 매만지고, 너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손끝에 닿아 흔들리는 느낌이 좋았다. 쓰다듬을 받는 너도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올린 채로 눈을 감고 가만히 쓰다듬을 받았다. 평화로운 오후다운, 따스한 풍경이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사람들이 웃으며 떠드는 소리. 내가 작게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 사랑스러운 소리 사이에서,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 오늘의 그 악몽에서, 그 달에서 들었던 소리에 나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일어나 의자는 뒤로 나뒹굴었고, 웃으며 떠들던 사람들은 차갑고 딱딱한 가면을 쓴 듯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사랑스럽게 지저귀던 새들은 이미 차가운 시신처럼 굳어 바닥으로 떨어져 짓밟혔다. 너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서 나를 응시했다. 네 입에서 새어나온 목소리는, 망가진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마냥 뭉개지고 치직거렸다.
“그런데, 마리아.”
너는 나를 보며 웃었다. 밝은 미소였다. 목소리와, 주위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웃고있는 네 눈가에 피가 맺혀 흘렀다. 너는 손을 뻗어 내 목을 쥐었다.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네 뒤로 보이던 카페의 모습은 점점 어둠에 잠식되듯 흩어지고 짓눌려 부서졌다. 그림에 잉크를 뿌린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당신을 원망하는 동안,”
너는 더욱 힘을 주며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콜록 이며 너를 바라봤지만, 너는 이미 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지워져 어둡게 변해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네 손을 긁으며 울먹였다. 호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악몽은 끝나지 않을 거에요.”
시야가 암전되고, 다시 벗어날 수 없는 어둠이 나를 가뒀다,
*
눈을 뜨니, 차가운 새벽 공기가 나를 쥐듯 서늘했다.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갈라진 목에서는 꺾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긴 어딜까. 카페도, 달도, 사무전도 아닌 장소였다. 낡아 무너질 것 같은 오두막. 나는 오두막의 구석에 묶여 바닥을 보는 상태로 누워있었다. 너덜거리게 해진 옷을 입고 있었고, 드러나 있는 팔과 다리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푸석해진 검은 머리카락보다 어두운 밤이 창문 밖으로 펼쳐져 있었다. 방금 그것도 꿈이었던 걸까?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삐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저스틴이었다. 네 이름을 부르기 위해 벌린 입에선 갈라진 목소리가 힘없이 울렸다.
“ㅈ, 저스틴...”
“...”
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보며 혀를 차고, 오두막의 문을 닫았다. 어두운 오두막 안에서 너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네 모습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어디부터가 꿈이었을까. 이건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아니 그 모든 게 소용이 있을까? 나는 이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악몽은 나를 놔주지 않았고, 너는 나를 저주하고 증오했다. 그것뿐이었다. 참으로 간단한 사실이었다.
내가 눈을 뜰 수는 있을까. 이 악몽을 이길 수 있는 것일까. 너는 살아있을까 너는 돌아왔을까. 헛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생각은 곧 안개처럼 퍼지고 흐려진다. 나를 눈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보던 너는 원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 때문이야. 저스틴은 이를 그득 물며 제 손을 칼날로 변형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져있던 유리조각이 밟혀 깨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소리의 사이로, 아니면 그 소리를 덮는 듯 어떤 소리가 들렸다. 달에서, 카페에서 들었던 그 소리가. 그 익숙한 소리에 나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나는 웃고 있었고, 너는 나에게 팔을 휘둘렀다. 살점이 찢기고, 피가 튀기는 소리 사이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