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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뜬다. 몽롱한 정신에 잠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불쾌감이 온몸을 사로잡는다. 무언가 기분 나쁜 꿈을 꾼 것도 같은데,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면 꿈의 내용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이다지도 불유쾌한 꿈이라면, 차라리 기억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희미한 기억에 미련을 두지 않은 채, 그는 흐릿한 시야 너머 익숙한 인영을 눈에 담는다. 차차 초점이 잡히기 시작하고서야 들어오는 익숙한 집 안 풍경이, 그가 늘 영유하던 일상 속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늘 그렇듯, 평범한 하루다. 사쿠마 리츠의 하루는 언제나 비슷하게 흘러간다.

 

* * *

 

『Knight』 MARE

 

* * *

 

 눈을 뜨면 아침…은 아니다. 전적으로 아침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본인 때문에 나이츠의 활동은 대부분 오후부터 시작된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자의로 일어난 게 아니었던 탓에 한 손으로 어지러운 머리를 짚고 시야를 확보하면, 언제나와 같이 해사한 미소로 리츠를 반기는 유리가 눈앞에 있다.

 

 “일어났어, 리츠?”

 “으응……. 지금 몇 시?”

 “이제 막 12시 지났어. 히나쨩이 밥 먹으러 내려오래.”

 

 늘어진 하품 끝에 리츠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아직 제 곁에서 떠나가지 않은 잠을 쫓으며,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유리에게 오늘은 구르지 말라는 가벼운 걱정도 던져본다. 그러자 말을 채 떼기도 전에, …안 굴러…어엇!? 하고, 통통,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의 끝에 울리는 둔탁한 굉음이.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며 작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제 일을 안 치는 게 이상할 정도인 제 연인 덕분에 어느 정도 시야가 또렷해지기도 했겠다, 이부자리를 대충 정리해둔 리츠도 유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1층으로 옮겼다. 음식 냄새가 풍겨 올라오던 탓인지 막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속이 좀 출출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려가면 보이는 풍경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열심히 부엌을 오가며 음식을 나르고 있는 히나와,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 다리만 흔들고 있는 유리. 제가 내려온 걸 확인하고서 건네는 히나의 잘 잤느냐는 인사에 적당히 대꾸해준 리츠가 자리에 앉으면 으레 그렇듯 식사는 시작된다.

 리츠가 식탁 앞에 자리를 빼고 앉더니, 머지않아 부엌부터 거실까지를 죽 훑어보았다. 나머지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임금님은?”

 “작업실.”

 “안 불러와도 돼?”

 “이미 불렀어! 근데, 엄~청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라, 안 들리는 것 같아!”

 

 그리 말하는 유리의 대답에 쉽게 납득하고 말았다. 뭐, 어련히 배가 고프면 나오겠거니. 이후에 달리 바쁜 스케줄이 있던 것도 아니었던 데다 그다지, 일과처럼 던진 안부 급의 질문이었을 뿐이라, 레오의 부재는 지금의 리츠에게 있어서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그렇구나, 그런 대답을 작게 흘리며 그는 숟가락을 들었다. 평소답지 않게 플레이팅에 공을 들인 오믈렛이 시야에 잡히고, 곧 밥알을 예쁘게 포갠 달걀막이 밥술에 의해 고이 갈라진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있는 게…….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밥을 한 술 입으로 떠 넣은 리츠가 시선을 히나에게 던졌다.

 

 “웬일이야, 미~쨩.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데.”

 “으음~, 그런가? 오늘은 리츠도, 유리쨩도, 바쁜 날이 아니니까.”

 

 요컨대, 그냥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소리다. 레오 분의 오믈렛을 테이블 한쪽으로 치워둔 히나가 자리에 앉으며 대답하니, 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옆자리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기왕이면 오프였으면 좋겠어! 바쁜 건 아니긴 하지만, 밥 먹자마자 나가야 한단 말이야.”

 “유~쨩, 오늘 일정 예능 촬영 하나뿐?”

 “으응, 그냥 토크쇼라 그거 하나 찍고 바로 들어올 거야. 저녁 먹기 전에 들어올 수 있을걸!”

 “리츠는 오늘 오프지? 유리쨩 돌아오면 저녁도 다 같이 먹자.”

 

 좋아, 하고 대답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다들 오래간만에 맞는 휴식기니까. 내심 즐거운 마음을 품게 되는 건 아마 이 자리에 앉은 세 사람 모두 같을 터다. 리츠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다시 한 번 밥술을 떴다. 유~쨩이 오기 전까지 뭘 하지. 그런 실없는 생각이 떠오르는 걸 보면 어지간히 한가하긴 한 모양이었다.

 이따금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각자의 이야기를 주워담으며 보내는 점심시간 역시 당연하지만, 평소와 같다. 제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두 사람을 보며 저녁 메뉴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집 안의 실세도. 그제야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어, 흐뭇해하던 히나의 표정에 그림자가 지게 하는 지각생도. 레오보다 빨리 오믈렛 접시를 빼돌리고서 혀를 비죽 내미는 제 연인도. 그 모든 상황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리고야 마는 리츠 자신도. 그렇게 한바탕 시끌벅적했던 점심시간이 끝나면, 또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는 것마저,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일상. 그게 퍽 여유롭고도 재미없다고, 수저를 내려놓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품을 했다.

 

 “그럼, 유리! 다녀오겠습니다!”

 

 거의 동시에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치워 놓은 유리도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 발랄한 인사에 몰려오는 졸음을 잠시 뒤로 눌러놓은 리츠가 현관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잘 다녀와. 그런 인사와 함께 유리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가 내려앉고, 그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뺨을 붉게 물들인 그녀의 팔이 그의 허리에 감겼다 떨어진다.

 …역시 별로, 보내주기 싫은 느낌이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멍청히 시선을 유리에게 쏟으니, 눈동자에 담긴 그녀의 표정이 근심스러워 보인다는 기분이 바람처럼 사고의 파편들을 나부꼈다. 비슷하게 인기를 끌고 있는 나이츠도 모처럼 쉬는 시기인데, 유리를 찾는 팬들이 많아 일정이 끊이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헤아려 봐도 조금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고. 머릿속에 스며드는 잡념에 멍하니 제 애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니,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린 유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의문을 표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자기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는지. 눈을 깜빡거리던 그녀가 다시금 리츠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 내려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예고 없이 이어지는 그들만의 모닝 키스. 그제야 아차 싶어 손을 놓고 놀란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는 리츠에게 다시금 다녀온다고 태연히 인사를 남기고선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도어락 소리가 울리고 문이 닫힌다. 입술이 맞붙었던 자리에 남은 유리의 흔적 위로 리츠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볍게 얹혔다. 이내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던 그의 입 사이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글쎄, 내리 자고 있던 터라 본방송을 챙겨볼 일도 없지만, 아무래도 오늘의 별자리 운세 1위는 처녀자리일지도 모르겠다는, 뭐, 일순 그런 생각을 해본 것도 같았다.

 유리를 보낸 리츠는 다시금 2층의 제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스케줄도 없고, 유리가 돌아올 때까진 시간도 많이 남았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고 있자니, 제 애인을 배웅한답시고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잠이 슬금슬금 온몸을 감싸왔다. 이참에 잠이나 푹 자둘까. 근본 없이 튀어나온 퍽 자신다운 생각에 작게 실소가 터져 나온다. 그렇다고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하자기엔 유리 없이 할 만한 게 떠오르지도 않았으니 뭐, 달리 다른 선택지도 없긴 하다. 리츠는 제 머리칼을 한 번 헝클고서 한쪽에 대충 정리해 둔 이불을 끌어당겼다. 나중에 일어나 눈을 뜨면, 유~쨩은 어김없이 날 반겨주겠지. 그런 문장을 생각 한편에 접어놓은 채.

 

 

*

 

 

 눈을 뜬다. 몽롱한 정신에 잠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불쾌감이 온몸을 사로잡는다. 무언가 기분 나쁜 꿈을 꾼 것도 같은데,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면 꿈의 내용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누가 위에서 짓누르기라도 하는 양 무거운 몸을 일으킨 리츠는 흐릿한 시야를 바로 잡아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째깍, 째깍, 무정하게 울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바늘은 지금이 12시를 갓 넘긴 시각임을 알리고 있다. 당연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유리는 보이지 않는다. 저를 반색하는 차가운 적막에 미간을 찌푸린 리츠가 거칠게 이불을 걷어내고 곧장 1층으로 향했다.

 내려가면 보이는 풍경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밥때가 되었으니 히나는 평소와 같이 식사 준비로 바쁘다. 제가 내려온 걸 확인하고서 건네는 그녀의 잘 잤느냐는 인사에 적당히 대꾸해준 리츠가 자리를 빼고 앉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반찬과 자기 몫의 국그릇, 그리고 적당히 올려 담은 밥그릇이 각자의 자리에 놓인다. …딱, 4인분이다. 4인분. 빈자리에 놓인 그릇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츠가 숟가락을 들고서 히나를 향해 입을 떼었다.

 

 “임금님이야 작업실에 있을 테고……. 왜 4개야?”

 

 덤덤하게 내뱉은 말에 반응한 히나가 다시금 시선을 테이블 위에 쏟는다. 미처 다 올려두지 못한 반찬 그릇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로, 자신이 손수 차려놓은 밥상을, 그녀는 어째선지 한참이나 눈에 담아낸다. 그렇게 멀거니 말을 잊은 듯 발을 땅에 붙이고 있기를 몇 분이 지나서야 히나는 아차 싶었는지 그릇을 마저 놓아두고 리츠를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미안, 정신 놓고 있었나 봐. 치워야겠네~.”

 

 그리 말하며 그릇을 도로 무르는 히나의 안색에 서린 건 영락없는 당혹감이다. 그녀와 지낸 시간이 꽤 길었던 만큼, 그 작은 표정의 변화 정도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리츠는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 어떠한 대꾸도 돌려주지 않은 채 그는 이미 사용해버린 식기들을 개수대에 넣어두고 돌아오는 히나를 마주했다. 소리 없이 빙긋이 웃는 모습이 어째서일까, 조금 전에도 본 것 같다는 데자뷰처럼 다가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레오가 올라오길 기다리기도 전에 식사 시간은 시작되었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것은 수저가 식기에 부딪히는 소리뿐, 그 외에 다른 쓸데없는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다. 조금 전, 히나가 취한 행동을 보았기 때문에 부러 입을 다물고 있긴 하지만, 지금의 리츠에게 둘만이 덩그러니 놓인 이 상황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딱히 그럴 만한 이유랄건 없다. 그저, 자신들이 영위하던 현실에 금이 가버렸기 때문에, 갈라지고 쪼개져 지반부터 무너져버린 내면을 두고 남을 챙길 여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으니까. 미처 수습하지 못한 감정을 떠안은 채 바라본 세계에서, 웃음 짓는 얼굴로 바늘길 위에 서 있는 히나가, 그에게 있어서는 어지간히도 거슬리게 느껴졌을 뿐이다. 레오는 언제쯤에야 올라오려나. 살포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자니, 음식물이 넘어가는 속이 자꾸만 뒤틀린다. 가늘게 떨리는 히나의 손을 눈동자에 담고서야 리츠는 결국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미~쨩.”

 “…응? 왜 그래, 리츠?”

 “그거, 그만하면 안될까?”

 

 담담히 마주하는 붉은 눈동자 안에 담기는 또 하나의 붉은 눈동자가 어쩔 줄 모르고 요동친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되물어야 하는데, 앙다문 입술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도저히 이곳에 남아있기 힘들어. 리츠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죽은 유~쨩을 두고, 원래 없었던 사람이었던 양……. 언급도 뭣도 없이 멀쩡한 척 구는 거, 이제 그만 해.”

 “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히나 손에 들려있던 수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딱히 본인 입으로 확인사살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의도와는 달리 험한 소릴 내뱉게 되는 건……. 그래, 히나 탓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겠지. 자신만큼이나 죽도록 힘들어할 사람에게 상처를 줘가면서까지 명분을 만들지 않으면 버티기 힘드니까. 모든 걸 바쳐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을 품고 있는 자신을 앞에 두고 존재를 그저 묻어두려고만 하는 히나가 야속스러웠던 거겠지. 참도 쓰레기 같은 인간이다. 지금 이 순간 사쿠마 리츠는, 자기 자신에게 조소했다.

 

 “유~쨩이 죽은 지 벌써 이만한 시간이 지났어. 그런데 지금 미~쨩은 어때? 그렇게 바보처럼 웃기만 하면서 평소처럼 지내니까,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너는 여전히…….”

 “왜,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진정이 되는 것 같냐고……. 리츠는, 리츠가, 제일 잘 알잖아. 전부 알면서…다 알면서 어떻게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어!”

 “그럼 잘이라도 숨기던지! 보는 사람 짜증 나게 티 나는 행동이라도 하질 말던가!”

 “시끄러워!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데!?”

 

 꾸역꾸역 안쪽으로 밀어놓았던 감정이 터져 나온다. 아닌 때 쏟아져나온 부고에 히나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아, 아…아……. 무언가의 앓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무너져버린 그녀가 절망한 표정으로 리츠를 올려다보았다. 진정하고,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울분을 품은 저 적안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을 잃어가는 느낌이 든다. 히나는 후들거리는 손을 제 이마 위로 짚어냈다. 제가 더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나보고 어쩌란 건데……. 리츠도, 레오도, 불안정한 지금, 나까지 뭐 맨날 울기만 하면서 지내란 거야?”

 “그럼 지금 괜찮은 척하면서 자신을 제일 많이 갉아먹고 있는 게 누군데? 미~쨩이 그러는 거, 하나도 도움 안 되거든?”

 “…하, 도움? 내가 왜…….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속절없이 튀어나오는 폭언들이 서로에게 쇄도한다. 피차 헐 대로 헐어 너덜너덜해진 건 똑같은데도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저 아래에서부터 용솟음치는 탓에 상처 입은 마음이 거듭해서 생채기를 떠안았다. …히나, 릿츠! 우당탕, 불안정한 두 사람의 소란스러운 낌새를 눈치채고서 위층으로 뛰어 올라온 레오가 험악한 분위기 가운데 급히 두 사람을 막아섰다. 이미 잔뜩 날이 서버린 분위기 가운데 선 중재자의 목 뒤로 절로 침이 넘어갔다.

 

 “…두 사람 다, 진정해!”

 

 지금 이 상황에 너희 둘까지 싸우면 어쩌자는 거야! 가쁜 숨을 내쉬며 큰소리를 친 레오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 살벌한 분위기에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일단 둘 다 진정부터 시키는 게 먼저다. 그렇게 판단한 그는 우선 바닥으로 쓰러진 히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좋겠네. 챙겨줄 사람이 있어서.”

 

 …당연한 듯 먼저 히나를 찾는 레오의 행동에 자조의 말이 절로 튀어나온 건 정말 찰나의 순간.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소리에 말을 뱉은 사람도, 말을 들은 사람도 전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크게 뜬 붉은 눈에 레오가 몸을 숙여 안아 든 히나의 몸이 전보다도 더 심하게 요동치는 게 시야에 적나라하게 잡힌다. 분명 이렇게까지 상처를 주고자 할 의도는 없었는데, 그런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황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수를 두려고 했다. …이젠 싫어. 지쳤어.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리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갈게.”

 

 그 길로 리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 곧장 평소 제가 생활하던 방으로 들어갔다. 잠깐 릿츠! 하고,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소리를 듣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그로서는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그럴 이유가 없었다. 히나를 진정시키고 방으로 데려가는 건 제 임금님의 역할이고, 그 두 사람에겐 아직 의지할 상대가 멀쩡히 숨 쉬고 있다. 자신을 구성하던 모든 걸 잃어버린 건 자신뿐. 그런 자신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헛웃음을 터뜨린 리츠가 방문을 잠그고서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한낱 연인 하나 구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하게 느껴졌다.

 어디서부터가 잘못이었을까. 지금 와서 그런 걸 생각하는 게 의미 없다는 걸 앎에도 리츠는 간헐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유리여만 했을까. 구할 수는 없었던 걸까. 정말로, 유리는 다신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토크쇼 일정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 중앙선을 침범한 차량에 의해 유리는 목숨을 잃었고, 그로부터 그리 적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다 함께 슬퍼하던 것도 잠시. 이젠 다들 슬픔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고서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는데, 그런데 왜……. 생각의 끝에 그는 비소를 머금었다. 그럼에도 난 왜 아직도 그 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가.

 리츠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로 향했다. 지쳐버린 내면에 수면이 필요했던 탓이다.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듯 그가 침대 시트에 몸을 맡겼다. 베개에 얼굴을 묻자마자 올라오는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했다는 죄책감, 절망감, 상심. 그 외에도 갖가지 감정들이 섞이어 리츠의 몸을 잠식해 온다. 모든 빛을 차단한 방 안은 아직 해가 떠 있을 시간임에도 여전히 암막하다. 옅은 숨을 토해낸 그가 힘없는 손길로 아무렇게나 널린 이불을 끌어 머리끝까지 덮었다.

 …자야지. 리츠는 눈을 감았다. 반겨 줄 사람 따위 없는 세상에서 이 이상 깨어있을 이유 같은 건 없었다.

 

 

*

 

 

 눈을 뜨면 여전히 시간은 정오를 막 지난 참이다. 리츠는 생기를 잃은 눈을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실소가 터져 나온다. 그건 분명 반복되는 상황에 대한 인식을 그제야 바로 했기 때문이리라. …나, 이젠 알아. 알고 있어, 유~쨩. 허탈하게 뱉어내던 그의 웃음소리도 얼마 안 가 사그라들었다.

 몸을 돌리면 눈에 들어오는 건 환한 미소로 자신을 반기고 있는 유리다. 제가 모를 리가 없는, 틀림없는, 로아이다 유리. 그러나……. 그녀가 눈앞에 있는 이 상황은 아마 현실이 아닐 것이다. 이미 죽은 인간이 살아 돌아온다는 말 같은 거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니 이건 꿈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임에도 유리의 맑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이게 현실이었으면 싶다. 다 부질없어지는 기분에 리츠가 표정에 웃음을 띄웠다. 물론 그것이 웃음이었는지 울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게 어떻든 상관없었다.

 

 “리츠.”

 

 지독하리만큼 따스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이름이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 앞으로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고 한들 이 감각이 어찌 쉬이 잊힐까. 물기를 머금은 미소가 리츠의 만면에 자리잡히고 곧 거짓으로 점철된 제 앞의 연인이 자신을 끌어안는다. 당연하지만,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과 그리움으로 비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리츠는 입술을 물었다.

 

 “…사랑해.”

 

 목이 메어 잘 나오지도 않는 소리로 그런 문장을 뱉어냈던가. 리츠는 가능하다면 차라리 이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다. 네가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이라면, 도리어 영영 꿈에 갇혀 있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너는 그런 건 바라지 않겠지. 왜 그런 선택을 하느냐며 꾸짖고 말 거야. 리츠는, 모든 걸 놓아버린 사람 마냥 유리에게 몸을 기댔다. 그녀를 잃은 이후부터 반복해서 꾸는 이 꿈이, 저를 마주 보며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연인이 자꾸만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자신을 사무치도록 외롭게 만든다. 뺨을 타고서 눈물이 아래로 내리흘렀다. 이 꿈길에 끝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긴 한 거냐는, 그런 원초적인 질문의 해답을 찾을 의지도 그에겐 있지 않았다. 참 끔찍하도록 사랑스러운 악몽. 온통 거짓뿐이더라도 이대로 너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부르짖음이 울려 퍼지는 혼자만의 밤. 그 무상의 한가운데서, 사쿠마 리츠는 울부짖었다.

 

 ㅡ달빛이 상냥하게 내려앉는 밤중이다. 고른 숨을 내쉬는 그의 눈꺼풀 사이로 한 줄기 이른 이슬이 맺혀 또르르 떨어졌다.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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