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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이 막히도록 차올랐다. 맥박이 빠르게 뛰다 못해 턱 밑의 혈관이 터질 것 같았다. 나뭇가지에 긁혀 난 상처의 쓰라림은 느낄 새도 없었다. 그럼에도 발을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험한 산길은 사라지고 낡은 창고 안이었다. 녹슨 쇠 냄새와, 눅눅한 공기. 그리고…….

 

 “지켜준다고 약속해놓고.”

 

 ……짙은 혈향에 물든, 햇살 같던 여자아이가 한 명.

 

 “혼자 행복해?”

 

 

 

* * *

 

 

 

 “…….”

 

 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현실이라고 알리는 소리. 하지만 눈앞에 남은 붉은 잔상은 그리 쉽게 지워지지 못했다. 지독한 피 냄새도, 여전히 코끝에 남아있다. 소녀는 천천히 호흡을 되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8시 20분. 방 안은 캄캄하지만 아직은 저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화, 하면 받아줄까.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집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떨리고 있는 건 온 몸인가?

 

 휴대폰이 울리는 진동에 아자미는 입에 대던 물병을 내리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이 시간에 전화할 만한 사람이라면 시후토일까.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빗나간 예상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물을 마시고 있었더라면 사레라도 들리지 않았을까. 쉬는 시간은 30분까지. 잠깐 받아도 되겠지.

 

 “아자미, 어디 가?”

 “전화. 금방 끊고 올게.”

 

 전화 통화는, 아직 조금 그랬다. 어색하다고 할지 부끄럽다고 할지, 그도 아니면 생소한 감각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빨리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앞서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서, 이제 막 퇴원한 연인에 대해, 그는 꽤 과보호 상태였으니까. 주변 누구라도 그렇다고 알 수 있을 만큼.

 

 “여보세요.”

 【…….】

 “…먼저 걸어놓고 왜 조용해.”

 【……그냥.】

 “그냥? 아니 그보다,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떨리잖아.”

 【안 떨림다!】

 “…그래, 괜찮네. 그래서?”

 【…….】

 

 몇 초간의 틈이 신경 쓰인다. 저쪽에서 입을 다무는 만큼 이쪽에선 속이 탄다는 걸 이제는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아직 한참 더 걸릴 것 같다. 그렇겠지. 왜 아니겠어. 시간 제한이 있긴 했지만 아자미는 기다렸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사실 거짓말했어.】

 “어.”

 【……자주 꿈을 꿔. 내용은 비슷한데, 끝은 항상 같은… 악몽.】

 “…퇴원하기 전에 꾸던 거?”

 

 짧은 대답이 느리게 돌아왔다. 의식을 되찾은 뒤로 몇 번씩 꾸기 시작했던 것 같다. 보고 싶은 사람이 나오는 꿈이라고 했다. 보고 싶은데, 만나고 싶지는 않은 사람. 이 아이가 언제까지고 스스로의 상처와 아픔에 무디게 있을, '죄'의 중심. 타카하시 유우나.

 아자미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내가 지금, 갈까?”

 

 건너편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것이 선했다. 스스로도 제 변화에 적응해나가고 있는 중인데 오죽할까. 귀가 뜨거워지는 것 같다. 신쿠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니라고 대답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라고 한다면 연습이 끝난 직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볼 생각이었다.

 

 【……아니.】

 

 그럼 그렇지. 아자미는 이제 끊겠다는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놀라 멈추고 말았다.

 

 【내가 갈래.】

 

 …라니, 이제 막 퇴원한 애가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한 소리 퍼부어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래도 좋게 말해보려고.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아자미는 망연하게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하?”

 

 진짜 오겠다고? 지금? 당장? 이 시간에 여기로?

 

 “장난해?! 웃기지 마!!”

 

 제멋대로도 정도가 있다. 일찍 와서 늦게 돌아가는 것과 늦게 오는 것은 사정이 다르다는 건 둘째 치고, 아직 회복 기간이 필요한데 이럴 땐 제발 얌전히 있어주면 안 되는 건가? 황급히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이고 연결되지 못하고 끊기고 말았다. 아자미는 자연스레 이마를 짚었다. 등 뒤의 연습실 문이 슬며시 열렸다. 타이치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아-쨩… 미팅 시작한다는데…….”

 

 되는 일이 없다. 어쩌다 이런 애한테 반해서. 깊은 한숨을 내쉰 아자미는 급격히 몰려온 피곤함을 누르며 연습실로 돌아갔다.

 

 

 

* * *

 

 

 

 신쿠는 담화실에서 무쿠, 쿠몬과 만화책을 쌓아놓고 놀고 있었다. 아자미는 문 앞에 서서 그런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눈이 마주친 신쿠가 방긋 웃었다.

 

 “왔어?”

 “…….”

 “…화났어?”

 “어.”

 

 서로 눈빛을 주고 받은 무쿠와 쿠몬이 책을 들고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먼저 자러 갈게, 잘 자." 그렇게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피해주고 나니 남은 것은 정적이었다. 신쿠는 다소곳이 앉아 눈치를 보았다.

이제는 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바깥은 진작에 깜깜해졌고, 신쿠의 집에서 여기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신쿠.”

 “넵.”

 “너 아직 환자야. 알아 몰라?”

 “나 그저께 퇴원했는데…?”

 “다 나았어?”

 “아니요. …그치만 이제 밖에 나다녀도 된다고 풀어주는 게 퇴원이잖슴까!”

 “그래서 지금 잘했다고?”

 “……잘못했슴다.”

 

 간다고 할 때 오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회복도 덜 된 몸으로 자기가 올 건 뭐란 말인가. 이럴 때 보면 영리하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왔어.”

 “몰래 빠져나와서 택시 타고.”

 “……너 다시 병원 들어가.”

 “…그럴까?”

 “하아?”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정말 어디가 이상해진 것 같다. 의아하게 쳐다보니 신쿠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 멍한 눈을 하고 담담한 얼굴로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 역시 저 표정은 보기 싫다. 저런 무표정은 아픔에 무감각한 그녀가 아플 때 꼭 짓는 표정이었다.

아자미는 걸음을 옮겨 신쿠의 앞에 털썩 앉았다. 흐린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에 선명한 빛깔의 두 눈만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반들거렸다. 싫다. 정말. 이 아이가 아픈 모습을 언제고 반드시 마주해야 한다는 게.

 

 “…만나고 싶냐고 물었었지.”

 “…모르겠다며.”

 “응. 그런데… 이제 와서 자꾸만 꿈에 찾아오는 게, 무서워.”

 

 답지 않았다. 이런 약한 말을 내뱉는 게 거의 없다시피 한 그녀였는데. 늘 강하고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원망하고 있을까. 그러면, 그 아이도 곧 떠날 때가 된 거면 어떡하지?”

 

 아니야. 말하는 대신 손을 내밀어 잡았다. 버릇이 들어버린 대로, 왼손의 반지가 맞닿도록 단단히 깍지를 껴서.

 

 “착했다며. 네 친구.”

 “……응.”

 “네 탓 안 할 거야. 같이 죽으려고도 안 할 거야. 널 원망하고 따질 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서 하라고 해. 나는, …너 뺏길 생각, 조금도 없어.”

 

 마지막 말에 신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자미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솔직한 마음을 전한다는 건 역시 어렵다.

 

 “…역시 멋있네, 내 약혼자 씨는.”

 “……시끄러.”

 “풋, 하하하.”

 

 하지만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야, 다소 부끄러운 건 참을 수 있었다. 그러고 싶었다.

 처음 찾아온 사랑이라는 감정은 생각보다도 복잡하고 영문 모를 것이어서,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것을 바꾸어놓고 있었다. 자신의 변화가 스스로도 못 믿을 게 될 만큼.

 

 “아자미.”

 “왜?”

 “나 머리 빗어줘.”

 

 쑥 내밀어진 빗을 어쩔 수 없다는 듯 집은 아자미는 바닥에서 일어나 신쿠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돌아앉으라는 제스쳐에 신쿠는 헤헤 웃으며 아자미를 등지고 앉았다. 리본들을 거두고 완전히 풀어낸 물빛 머리카락이 손길에 따라 찰랑였다. 스윽, 스윽, 빗살이 머리카락 결을 따라 지나가는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한 번 빗어내릴 때마다 옅게 스며 있던 꽃향기가 풍겨왔다. 왠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들어 아자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빗질에만 집중했다. 머릿결도 좋아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머리핀 줘.”

 “다 빗었어?”

 “어. 핀만 꽂아줄 테니까 이제 집에 가서…”

 “그러면 실례함다아~”

 “?!”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향기가 코끝을 강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한쪽 허벅지 위로 생소한 무게감이 올랐다. 당혹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두 뺨은 물론이고 귀 끝까지 열기가 느껴진다.

 

 “아, 생각보다 딱딱한 느낌은 아니네. 베고 있을 만하다.”

 “…너,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응? 무릎베개. 음~ 그런데 이대로는 아자미가 불편하겠다. 두 다리 제대로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더니 태연하게 대답해온다. 늦을 대로 늦은 시간 빨리 돌려보내야겠는데, 당사자는 여유롭기만 하다. 도로 몸을 일으킨 신쿠가 어서 자세를 바로 하라는 듯이 아자미를 쳐다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깝다.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었다.

 

 “얼굴이 빨개졌네. 무슨 상상 했어?”

 “시끄러 그런 거 아니야! 헛소리 그만 하고 빨리 나와. 택시 잡아줄 테니까.”

 

 더 있다간 정말로 어딘가 이상해질 것 같다. 그러나 얼른 보내버리려고 일어나 나가려는 아자미를 신쿠가 답싹 붙잡았다. 잡힌 팔목에도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장난기 하나 없이 조용하고, 나지막했다.

 

 “가지 마. 나 안 갈 거야.”

 “……뭐?”

 “…혼자서 도저히 못 자겠어서, 그래서. 그래서 온 거란 말임다. 무섭다고 했잖아. 아자미가 옆에 있으면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런데 역시 집으로 부를 수는 없잖아.”

 

 팔목을 꾹 붙잡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지간한 싸움 상대 앞에서도 떨어본 적 없는 그녀가. 아자미는 천천히 돌아섰다.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연인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딱 한 번 본 적 있다. 그녀가 연기하던 과거의 단편 속에서. 15살 소녀가 아닌, 직접 마주한 적도 없는 9살 여자아이의 모습이 스쳐갔다.

 

 “오늘만. 오늘 하루만. 부탁이야.”

 “…….”

 

 아자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녀가 앞으로 이런 식으로 제게 어리광을 부리는 날이 또 얼마나 있을까. 있더라도 분명 몇 안 되겠지. 미묘했다. 기대주는 건 좋은데, 가슴 한 켠이 아리다.

결국 도로 자리에 앉아버린 아자미는 한숨을 삼키고 제 팔목을 붙잡고 있는 손을 떼냈다.

 

 “…누워.”

 “……정말?”

 “집에 갈래?”

 “아니, 아니.”

 

 마음이 바뀔까 얼른 제 다리를 베고 누워버리는 모습이 조금 웃겼다. 이런 걸 귀엽다고 하던가.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부끄러워?”

 “아니거든.”

 

 즉답에 신쿠가 키득키득 웃었다. 아자미는 입매를 일그러뜨렸다가는 소파 한구석에 누군가가 두고 간 담요를 끌어다 신쿠에게 덮어주었다.

 

 “아. 불은 못 끄네.”

 “끄고 올까? 안 끄면 사쿄 오라버니가 와서 잔소리하겠지?”

 “어, 그래.”

 

 덮고 있던 담요를 둘둘 말고 일어난 신쿠가 도도도 달려가 스위치를 껐다.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해진 담화실은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에 그리 많은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만이 살아있을 뿐.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부딪혔지!”

 “아니, 아니,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휴대폰 어쨌어.”

 “아마도 네 옆에…….”

 

 누를 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작 켤 준비를 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늦었지만 휴대폰을 들어 플래시 불빛을 켜주자 어째서인지 반대쪽에 가 있던 신쿠가 헤헤 웃으며 돌아왔다. 어이가 없어 정색한 얼굴로 쳐다보니 시선을 피하며 둘둘 말고 있던 담요를 풀고선 슬며시 또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불빛을 끄자 어둠이 짙어진 듯한 착시가 일었다. 무엇도 분간하기 힘든 암흑 속에서, 신쿠가 담요를 덮느라 움직이는 그대로 간질간질한 느낌이 전해졌다. 조금 전 맡았던 향기가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제게도 물들까? 아니, 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데.

 

 “…아자미.”

 “…왜.”

 “나 잠들고 나면 방에 들어가도 됨다.”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해.”

 “응. …그런데, 잠들고도 조금만 더 있어줄래? 혹시 또 악몽을 꾸면, 피를 뒤집어쓴 그 아이를, 만나게 되면…….”

 

 무섭다고 한 건 진심이다. 그 날은 지옥이었고, 지금도 그랬다. 신쿠는 입술을 깨물었다. 담요를 꾹 붙들고 있던 손이 다른 손 위로 올라가 붉은 선을 그리려다 온도가 다른 큰 손에 붙잡혔다.

 

 “깨워줄게. 여기가 현실이라고 알려줄게.”

 “…….”

 “걱정 말고 자.”

 “……응.”

 

 고요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불안을 누그러뜨렸다. 아, 역시. 신쿠는 작게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제 손을 괴롭히는 대신,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는 연인의 손을 꼭 잡고서 잠을 청했다. 언제나, 언제나, 그의 곁에 있으면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안정이 찾아왔다. 그것은 신쿠에게 있어서 굉장히 귀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 아마 두 번 다시 없겠지. 그를 사랑하는 일이, 지키지 못한 소중한 친구의 원망을 사게 될지라도 포기하지 못한 만큼.

 

 "…잘 자."

 

 이내 완전히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닿아 있는 서로의 체온 뿐이었다.

 

 

 

* * *

 

 

 

 숨이 막히도록 차올랐다. 맥박이 빠르게 뛰다 못해 턱 밑의 혈관이 터질 것 같았다. 나뭇가지에 긁혀 난 상처의 쓰라림은 느낄 새도 없었다. 그럼에도 발을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험한 산길은 사라지고 낡은 창고 안이었다. 녹슨 쇠 냄새와, 눅눅한 공기. 그리고…….

 

 “지켜준다고 약속해놓고.”

 

 ……짙은 혈향에 물든, 햇살 같던 여자아이가 한 명.

 

 “혼자 행복해?”

 

 아니. 그렇게 대답한 순간, 두 여자아이는, 아니, 그 날로부터 조금도 크지 않은 여자아이와, 홀로 커버린 소녀는, 지옥 같던 창고가 아닌 새카만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피투성이 여자아이는 하얗게 뒤집어진 눈으로 가만히 소녀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조차 괴롭지만, 소녀는 당장 도망치지 않았다. 꼭, 전하고 싶은 한 마디가 있었으니까.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나, 아직은 너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

 “조금만 더 기다려줘. 반드시 만나러 갈게. 이 약속은 꼭 지킬 검다. 정말이야. 조금만, 조금만 더 용기가 나면, 그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의식하지 못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떨리는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었다. 어둠을 거둬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뚜렷하게, 소녀의 이름을 담고 있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너를 만나러 갈게.”

 

 ―부서진 시야를 뒤로하고 젖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새벽의 옅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빛깔의 푸른 두 눈이었다. 잠을 청하던 그 때부터 한 번도 놓지 않았을 손의 온도가 따뜻했다. 괜찮아?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조금은 낮았다. 깨워주겠다고, 여기가 현실이라고 알려주겠다고 하던 약속대로 소녀는 소년에게 이끌려 돌아왔다. 어색한 손길이 눈가를 스치며 꿈결에 흘린 눈물을 거둬갔다. 소녀는, 소년을 향해 방긋 웃었다. 정말 좋아해. 라고, 전혀 다른 대답을 속삭이며.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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