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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내게 미소를 짓기 시작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내게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한 지 이 년을 넘겼다.

 희망이 벗겨져 나가기 시작한 지도 그쯤 되었다.

 전하지 않는 사랑을 근사한 척하기도 힘에 부칠 무렵에, 눈을 감으면.

 

 아, 그리고 그리던 꿈속이었다.

 

 : 트로이메라이.

 

 1.

 수고하셨습니다, 어딘가 앙칼진 조감독의 목소리에 다 함께 똑같은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였다. 오늘 가장 중요했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끝낸 참이니 이제 남은 일정이 없으려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 메모장의 스크롤을 내리던 중에, 우뚝하고 손가락이 굳는가 싶더니 이내 짧게 전원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없어, 없다. 다른 일정은 없네, 잘됐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메모 같은 건 하지 말 걸 그랬나. 기억한들 의미라곤 하나 없는데.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었다. 온기 없던 다정한 말. 나만 사랑한다는 여상스러운 미소. 답지 않게 눈치를 발휘해 기분 좋은 짓만 골라 하던 그. 고양이처럼 크고 뾰족한 눈이 예쁘게 접히면서, 오늘도 좋아한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오! 히나~! 지금 일 끝났어? 이틀? 이틀만인가!”

 “아~, 레오다. 좋은~, 오후? 응, 응. 이제 막 끝났어. 아쉽지만 사흘만이야.”

 “아깝게! 뭐 이틀이나 사흘이나. 단체 라인이 있으니까 별로 못 만났다는 느낌도 안 들고?”

 “으음, 그러게? 그래도 졸업──”

 

 졸업 전까진 항상 같이 있었잖아.

 

 “응?”

 “응? 아니? 레오는 왜 나와 있어, 오늘 일정 끝난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도리 저으며 말을 바꾸자, 눈을 한 번 깜빡인 그가 곧 방긋 웃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귀여운 얼굴이라니까……. 시선을 굴리다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나를 만나 기쁘다는 양 한껏 들뜬 그는 곧 입술을 열고는, 내가 예상하던 대답을 주었다.

 

 “끝났어. 지금은 세나 기다리는 중!”

 “헤~. 오늘도 같이 식사?”

 “약속은 안 했지만 아마도? 히나도 같이 갈래?”

 “으응, 히나는 됐어. 오늘 드라마 촬영해서~ 너무 피곤해.”

 

 샐샐 웃으며 손짓으로 거절의 의사를 비쳤다. 무엇이 이상한지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 고개를 기우뚱하더니, 그가 곧 알았다고 수긍한다. 오늘도 다름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꼭 붙잡다가 만나서 기뻤어! 그리 외치고 탁 놔 버린다. 보고 싶었거든, 오해를 불러일으킬 화법을 고치라고 우리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텐데. 이제 모르겠다.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다음에 또 봐. 집에 가면 라인 보내고. 일찍 자!”

 “이 시간에 뭐 위험하다고. 알았어, 저녁 잘 먹어.”

 

 거짓말, 거짓말. 단 한 번도 속은 적이 없다. 어차피 내가 파고들 틈이 없으니까.

 

 

 2.

 체력은 없는 편이 아니다. 누구한테 비교하느냐, 꼽아보자면……레오에게는 못 미치려나. 아주 어릴 땐 자주 병치레를 앓았을지 몰라도, 나이를 좀 먹고서는 그것도 완전히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일 두 개 했다고 내가 피곤할 일도, 사실 없었다.

 그럼에도 피곤하다며 자리를 뜬 것은 그냥, 그러니까, 그거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나의 청춘, 내 짧은 청춘의 페이지, 벅찬 두근거림으로 가득한 청춘은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내 청춘의 모든 것이었다.

 

 ‘답례제도 좋았지. 만족스러웠어.’

 

 둘이 화해해서, 마지막까지 나를 발견하지 못해서.

 

 ‘졸업여행 즐거웠어.’

 

 같이 지내는 걸 보니 안심했다.

 

 ‘이제 매듭을 지을 때야.’

 

 그럴 셈으로 아이돌로 전향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나는 알고 있었다. 다정한 말, 여상스러운 미소, 나를 위한 사랑의 속삭임. 벌써 2년이 더 넘어갔다. 모른 척해온 작고 작았던 희망의 불씨가 그때부터 강풍을 맞기 시작했다.

 셋이 함께였던 학창시절, 3년간 내 손을 놓지 않아 줬던 두 사람. 하지만 역시 서로가 첫 번째인 그들.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그에겐 그가 가장 예쁘고 완벽한 사람이자 사랑하는 친구였고, 그에겐 그가 가장 소중하고 경애하며 또 대등한 친구였다. 그걸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부려선 안 됐다.

 나는 무엇이든 두 사람의 두 번째면 충분했다. 그것에 만족했다.

 

 ‘더 바라지 않았어.’

 

 찾아주는 것도, 챙기는 것도, 아끼는 것도, 떠올리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두 번째가, 좋았는데.’

 

 나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 올 리 없는 피곤이 급작스럽게 쏟아진다. 자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미련 덩어리라는 걸 상기시켜줄 뿐이라서. 꿈속은 나만의 왕국이라며. 리츠는 거짓말쟁이. 느릿느릿 감기는 눈꺼풀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 묻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은 어차피 꿈일 뿐인데.

 

 

 3.

 “……”

 

 깜빡, 깜빡. 작게 눈꺼풀을 떨며 정신을 차린다. 언제나 같은 곳, 같은 풍경. 소파 위, 소리 하나 없는 공간은 실제로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집 안이었다. 내가 미적거리며 눈을 뜨면 일어난 자리는 늘 똑같았다. 머리 위에서 페리도트가 동그란 눈을 부드럽게 접고 인사했다.

 

 “잘 잤어? 히나.”

 “……좋은 아침, 레오.”

 “오늘도 예쁘다.”

 

 그리 말하고 그가 내 이마에 짧게 입맞춤했다. 쪽, 하고 들리는 소리는 좁지만은 않은 집이 고요한 탓에, 거실에 울리고 말았다. 울리지 않더라도 내겐 들렸겠지만. 포근하진 않은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려 몸을 비틀자 아쉽다는 듯, 귀엽다는 듯 내 뺨과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손가락이 있었다. 나와 눈을 꼭 맞춘 그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예쁜 히나, 귀여운 히나. 어이없다는 속내를 감추고 실소를 흘렸다. 정말, 정말이지, 내게 신물이 난다.

 

 “레오도 예뻐.”

 “예뻐~?”

 “으응, 멋있어. 나 일어날래.”

 “에에……, 그래. 음…… 자, 공주님.”

 “고마워, 아~……. 기사님?”

 

 이제 왕이 아닌 그에게 무어라 대꾸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들의 원형을 입에 담아본다. 기쁘게 웃는 모습이 언젠가 본 가장 환했던 그때와 얼핏 닮은 것 같이도 보였다. 아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미소이기 때문일까. 물론 지금이라면 뭐라고 불러도 다 웃어줄 것 같다만. 손등에 키스하는 그를 보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내 꿈인걸.

 

 “오늘은 뭐할까?”

 “응…. 그러게, 난 이렇게 가만히 있기만 해도 좋은데.”

 “히나가 원한다면야.”

 

 꿈. 꿈이다. 애정이 가득 담긴 대답에 고맙다고 작게 대꾸했다. 이게 현실이었다면 얌전히 있어선 좀이 쑤신다며 뭐든 행동을 취했을 텐데. 이렇게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이, 내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이 눈길이 바로 꿈이라는 증명이었다.

 이 지독한 악몽이 벌써 2년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잠드는 것이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꿈속의 나는 그와 죽고 못 사는 연인이었고, 그의 모든 신경은 나에게로 쏠려 있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우스워서, 기가 막혀서 몇 번이나 제 뺨을 꼬집다가 당기고, 제발 정신 차리라며 입술을 짓씹었다. 물론 그 무엇도 나를 깨어나게 하지 못했고, 감각 역시 몽롱해 얼마 안 지나 바로 포기했다. 난 이런 건 바란 적 없다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 누군가 물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네가? 비웃음 섞인 질문이었다.

 내내 고개를 돌리던 연심이, 욕심이 제멋대로 형태를 만들어서 오지 않을 행복을 그려주었다. 속이 녹아버릴 만큼 다디단 행복을 듬뿍 줄 테니까,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려보라고, 아주 끔찍한 짓을 하고 가버렸다. 그날 알았다. 확실하게 깨달았다. 내 사랑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루어질 일이 없다고. 이건, 결말을 알고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내가 가여워 건네준 쓸데없는 선물이라고.

 

 “레오는 뭘 하고 있었어?”

 “히나가 일어날 때까지, 어……작곡?”

 “오선지는?”

 “여기!”

 

 아까도 있었던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레오가 당당하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빼곡히 적힌 음표의 향연은 꿈속에서도 기분이 좋아서, 어차피 아는 곡임이 분명할 텐데도 눈을 조금 찡그리고 오선지를 들여다보았다. 꿈을 꾸면 늘 레오의 신곡을 확인하곤 하는데, 아는 노래라고 해서 딱히, 의외로, 이것이 재미없거나 지루하진 않았다.

 

 ‘…오늘은 2집 타이틀이구나.’

 

 뿌듯하게 종이들을 건네고 내 반응을 기다리는 모습이 퍽 익숙했다. 그러고 보니, 이 곡을 처음 받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차분하게 눈을 내리떴다. 하기야, 신곡인데. 기대감 어린 그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러니까, 반짝반짝 눈동자를 빛내는 그에게 살포시 미소 짓고서, 기쁘다는 듯 대꾸했다.

 

 “이 멜로디 맘에 들어.”

 “히나를 생각하면서 썼거든!”

 “말은.”

 

 즐거운, 연애. 행복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중한, 시간. 추억. 전부 꿈에서 채우라는 것처럼, 한 아름 안겨준 이 벅찬 순간이 깨어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행복하다.”

 “정말?”

 “응, 세상에서 제일.”

 

 사르르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적어도 이 악몽 속에서만큼은.

 

 “사랑해, 히나.”

 “……이제 가볼게.”

 “다음에 또 봐.”

 

 기다릴게, 그의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저편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4.

 ‘알람…이 아니라, 전화네.’

 

 비몽사몽 눈을 뜨니 머리가 아프다. 창문 너머로 내리쬐는 햇살이 너무 좀, 많이 따뜻하고 밝아서 가만히 누워있는 게 고역이었다. 이건 폭력이야. 얼굴에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한 번 노려보고 나서야 여태 끊기지 않는 음악 소리에 신경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울리는 음악이 생각했던 소리와 사뭇 다르다. 어떻게든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핸드폰이 있을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잡은 폰 액정에 떠오른 수신 화면은 사랑스럽기 끝이 없는 친구의 이름을 비췄고, 글자만 봐도 밝아지는 듯한 그녀의 이름을 보고 작게 한숨을 뱉었다. 잠꾸러기가, 이 시간에 웬일이람.

 

 “여보세요, 유리쨩?”

 “히나쨩! 잘 잤어? 어제 연락했는데 안 받고!”

 “일찍 잠들어서…왜애?”

 

 전화를 받아서 기쁘다고, 받지 않은 것이 서운하다는 것처럼 아쉬운 목소리를 내며 유리가 아침 인사를 건넨다. 아침, 음, 그렇지. 아침이구나. 피곤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 번도 깨지 않고 지금까지 잠을 잔 모양이다. 요즈음은 잠에 빠지면 좀처럼 일어날 줄을 모른다. 뭐, 푹 자면 좋은 거지만. 졸린 눈두덩이를 꾹 누르며 유리의 대답을 기다리면, 여전히 발랄한 음성이 귓가에 종달새처럼 울렸다.

 

 “으응~. 히나쨩 오늘 오프지, 싶어서?”

 “응~?”

 

 제 일정을 또 어찌 알았을까, 속으로만 잠시 생각하다가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건너편에서 응? 하고 질문도 아닌 것이 들려왔지만, 어떻게 알면 뭐 어떻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볍게 얼버무리곤 말았다. 그게 뭐야, 유리가 예쁜 목소리로 웃었다.

 

 “오늘 약속 있어?”

 “아니, 없지…?”

 “나랑 놀러 가자!”

 “응? 응? 조, 좋아?”

 

 잠이 채 가시지 않은 내게 놀러 나갈 제안이 들어왔다. 멍하니 얘기를 듣다가 외출 얘기에 눈을 몇 번 깜빡하고서, 스피커 너머의 상대에겐 보일 리도 없을 텐데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수락했다. 애초에 거절한 적도 별로 없으니까 상관은 없지만. 오프는 내가 아니라 리츠와도 곧잘 보내는데, 오늘 리츠한테 일정이 있었던가. 조금 신경이 쓰여 물어보니 아, 하는 목소리 뒤로 살짝 불만스러운 감정이 섞여 나왔다. 오늘 레오랑 촬영 하나 있다고. 그러니까 걔가 리츠를 독점하거나 그러는 게 아니래도. 끙 소리를 내는데 건너편에선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다시금 발랄하게 얘기를 던졌다.

 그리고, 지금부터 찾아오겠다는 말엔 아무래도 당황했다. 결국은 알겠다고 한 것이 오늘도 여전하다 싶었다만.

 

 “천천히 와. 다칠라.”

 “응~ 금방 갈게!”

 “음…….”

 

 

 

 들떠서인지 붉게 상기된 볼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유리와 손을 잡고, 한 손에는 크레이프를 들고 길을 거닌다. 크레이프를 쥔 쪽 팔엔 어느새 쇼핑의 흔적이 가득하고. 옷가지가 한가득 있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운지 유리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나까지 즐거워지는 것 같아 괜히 미소가 나왔다. 몽글몽글, 행복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맞아, 이게 행복이었지. 걸음을 옮길수록 뿌옇게 흔들리는 시선 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끔찍한 꿈 같은 게 아니라, 이렇게 소소하고 바로 옆에 있는 이런 거. 기분이 좋아 입을 뗐다. 유리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정신이 몽롱하다. 깜빡깜빡, 신호등이 점멸한다. 깜빡, 또 한 번. 어라. 시야가 빙글 돌았다. 어디선가 비명처럼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은데…….

 나는 다시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5.

 “……레오.”

 “히나, 일어났어?”

 “응, 유리쨩이랑 놀고 있었는데.”

 “에~, 항상 율만 챙기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작게 불평하는 모습은 제법 사랑스럽다. 키득거리며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려 하자 불만을 내비치면서도 일어나기 편하도록 팔을 들어주었다. 레오 옆에 제대로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가만히 있는 모양이 여전히 꿈 같았다. 꿈이지만. 손에 쥔 오선지를 슬쩍 들여다보니 오늘은 잊으려야 절대 잊을 수 없는 곡이 쓰여 있었다.

 

 “뭐 먹을까? 레오,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음! 히나가 만들어준다면 뭐든…오믈렛?”

 “그거 좋아하네.”

 “히나가 좋아하지.”

 

 픽 웃고는 다시 작곡에 시선을 옮기는 것이 조금 현실의 그를 닮았다. 꿈속에서 식사를 만들면 그는 자주 오믈렛을 요구하곤 한다. 히나가 좋아하지, 그 말대로 내가 좋아하니까. 요리하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그런 내 의사를 반영해서인지 오믈렛이 먹고 싶다고 내게 부탁하는데, 여전히 멍청한 나는 그것이 귀여워 알겠다며 기꺼이 조리기구를 손에 쥐었다. 만들어진 세상, 가짜 행복. 현실에서 그와 이상적인 친구를 유지할수록, 그가 내게 언제나처럼 미소 지어줄수록, 내가 우선이 아님을, 알고 있는 진실을 매일같이 실감할수록 꿈이 나를 잠식해왔다.

 이거 봐, 행복하지? 네 소망을 다 구현해놨으니까, 현실 같은 건 잊어버려. 여긴, 상냥해.

 꿀이 떨어질 것 같은 좋아한다는 눈을 보면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다 먹으면 뭐 할까?”

 “오늘은 안가?”

 “……더 있을래.”

 “얼마든지.”

 

 오믈렛을 다 먹으면 뭘 할까. 같이 영화를 볼까,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는데 청소를 해도 좋겠다. 아니면 나가서 산책을 할까, 손을 잡고 공원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같이 노래방이나 게임센터를 가도 좋고, 저녁은 레스토랑에서 먹자. 전망 좋은 가게를 알아보라고 얘기해두는 게 좋을까. 왠지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이게 행복이구나.

 

 “인사만 하고 올게.”

 

 어렴풋이 나를 부르는 몇 개의 목소리가 들리다가, 곧 사라졌다.

 

 

 6.

 무기질적인 소리가 뇌를 가득 채웠다. 반갑지 않은 알코올 냄새, 팔에서 느껴지는 바늘 같은 무언가, 싸늘하고 차가운 공기. 그리고, 내 손을 잡는, 어딘지 따스한 온기.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끓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팡, 터지고는, 눈을 뜨라고 말을 걸었다.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마셨다.

 

 “……레오.”

 

 기분 나쁠 정도로 새하얀 공간에서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고 있는 주황색 머리카락의 그를, 조용히 불렀다. 침대맡에 얼굴을 묻다시피 있던 그가 움찔하더니 팍 고개를 위로 들어 나를 빤히 보았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히나, 괜찮아? 몸, 좀 어때?”

 “괜찮…아.”

 “물! 물 가져올게!”

 

 대답하려다 잠시 목울대에 손을 대려니 레오가 호들갑을 떨며 냉장고로 향한다. 뭐지, 아까까진 유리하고 있었을 텐데. 자못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을 가져오는 레오를 보고 이상한 얼굴을 했다. 아직 꿈인가. 눈을 약간 찡그리고서 그가 가져온 물을 받아들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

 “괜찮아…레오 왜 여기 있어?”

 “율이 히나가 쓰러졌다고 연락해줬어.”

 “그래……. 이즈미는 어쩌고? 안 기다려? 오늘은, 같이 저녁 안 먹어?”

 “지금 세나가 중요해?”

 

 이거 꿈이네. 기가 막힌다는 듯한 레오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역시 꿈이구나….”

 “……뭐?”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눈을 하고서. 이 새삼스러운 반응은 뭘까, 내가 더 의문스러워 갸웃하다가, 쓰러질 때 부딪혔는지 뒤통수가 깨질 것처럼 아프게 울렸다. 아직 피곤한데, 기력 없는데. 인상을 찌푸리고서, 눈을 꾹 감았다 뜨고 고개를 저었다.

 

 “꿈이잖아, 그렇지?”

 “뭐…무슨 소리야, 지금?”

 “우리 레오는 꿈에서도 참 잘생겼지.”

 “아니, 히나….”

 

 심각한 표정을 하다가도 살짝 얼굴을 붉히는 게 귀엽다. 거봐, 꿈이잖아.

 

 “현실이라면 이즈미보다 날 우선할 리가 없는데…….”

 “……무슨.”

 “가벼운 기절이니까, 당연하지.”

 “히나!”

 

 머리를 부딪쳤다니까. 두개골이 울려 깨질 것 같은 감각이었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순간 소리를 질렀던 레오가 사색이 되어 급하게 사과해왔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호들갑이지. 원랜 좀 더 차분했던 거 같은데…….

 어딘지 분한, 또 살짝 억울한 것 같은 얼굴을 하는 레오에게 설핏 웃으며 손을 뻗었다. 내가 도망치기라도 할 것처럼 덥석 잡아 오는 양손이 괜히 귀엽고 우스웠다.

 

 “나 어디 안 가.”

 “……지금은, 갈 것 같아.”

 “안 가, 인사만 하고 오겠다고 했잖아….”

 

 무슨,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레오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근데 인사 못 하겠어. 꿈에서 깨질 않으니, 도리가 없었다.

 

 “계속…여기 있을 테니까….”

 “히나?”

 “……괜찮아, 이제 현실에서 눈뜰 일 없어.”

 

 피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을 내리눌렀다. 감기는 눈꺼풀 틈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경악이나 절망 같은, 비참한 눈을 한 레오의 얼굴이었다.

 멀어지는 의식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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