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PG라고 알아?”
어느 날, 츠바사가 그렇게 운을 뗐다.
“티… 뭐?”
“테이블 탑, 혹은 테이블 토크 롤플레잉 게임. 줄여서 TRPG. 인원수가 맞는 다인 시나리오를 발견해서 말야, 준비해 와 봤어.”
주문한 셰이크를 한 모금 마시고, 츠바사는 가방에서 클리어 파일을 꺼냈다. 그리고서 밴드 멤버들과 매니저들에게 안쪽의 종이를 몇 장씩 나눠 주었다.
“뒤쪽에 적힌 비밀 사명이라는 건 아무한테도 알려주면 안 돼. 진행에 따라 밝혀가는 거야. 숨어든 한 명의 늑대가 누구인지.”
겉면에는 ‘당신을 포함한 모두는 절친한 친구이다. 오늘은 모두가 함께 추억의 테마 파크에 놀러 왔다. 당신의 사명은 이 곳에서 다시 한 번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종이 뒤쪽에는 ‘최근 우리들 중 한 명이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다. 당신의 진정한 사명은 그 한 명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텟페이는 고개를 들어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봤다.
‘선배?’
사치코와 눈이 마주쳤다. 연인이 애매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는 평소대로였다. 대체 무슨 사명을 받은 걸까. 뒷면의 사명은 본인이 밝히면 안 된다고 했다. 기회가 오면, 가장 먼저 사치코의 사명을 알아볼 수 있을까.
“어라, 선배.”
동네의 생선가게 앞에 선 연인의 모습이 보였다. 반갑게 인사하려던 텟페이는, 이내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주춤했다.
“무슨 일이심까?”
“어, 블레이스트의 드럼이잖아. 이 손님이랑 아는 사이야?”
생선가게의 직원이자 오시리스의 드럼 담당, 신이 쾌활하게 물어 왔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저번에 본 적 있잖슴까? 우리 매니저 선배임다.”
“으음, 그런 기억은 없는데. 뭐야, 누구 놀리는 거야?”
“이쪽이 묻고 싶슴다. 사치코 선배, 여기 자주 와서 생선 사 가셨잖슴까.”
“아까도 네 선배한테 같은 얘기 들었어. 근데 정말이라면 내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잖아?”
신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봤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텟페이 군.”
사치코가 팔을 잡았다. 놀라 쳐다보자, 연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죄송해요, 다른 가게랑 착각했네요. 다음에 올게요.”
선배가 신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텟페이는 영문도 모른 채 사치코에게 상점가 끝까지 끌려갔다.
“사치코 선배, 이게 대체…….”
“텟페이 군은 날 확실히 기억하는 거지?”
“네?”
불안한 얼굴로, 연인이 텟페이를 올려다봤다. 팔을 붙잡은 작은 손의 떨림이 전해져왔다.
“제가 선배를 잊어버릴 리가 없잖슴까.”
“……모두가, 나를 모른다고 했어. 그래도 생선가게에선 알아봐줄 줄 알았는데.”
사치코는 신과 친했다. 그래서 더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계획한 장난이라기엔 규모도, 정도도 지나쳤다.
“다른 선배들한테 전화라도 해보죠.”
“안 돼!”
선배가 소리쳤다. 주위의 눈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사치코는 급히 목소리를 줄였다.
“미안해. 다른 애들한텐, 연락하지 말아줘.”
“하지만, 선배.”
“무서워. 그 애들까지 나를 모른다고 할까봐.”
TRPG의 시나리오가 생각났다. 거기서 사치코가 맡은 캐릭터는, 자신의 기억이 애매함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게임에서는 캐릭터일 뿐이고, 사치코는 현실이라는 점이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는 게 낫겠네요.”
“……응.”
“바래다 드리겠슴다. 걱정 마십쇼, 제가 옆에 있잖슴까.”
“응.”
내민 손을, 연인이 꼭 잡았다.
사치코네 집이 위치해야 할 곳에, 다른 집이 있었다. 문패에 쓰인 성씨도 달랐다. 그 사이, 손에서 사치코의 작은 손이 빠져나갔다. 텟페이보다도 사치코 본인이 훨씬 놀랐을 터였다.
“저까지 길을 잘못 들었나 봄다. 일단 이 골목을 나가서…….”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사치코 선배!”
식은땀을 흘리며, 텟페이는 잠에서 깼다. 꿈인 걸 왜 몰랐을까.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조금 이른 아침이었다. 그래도 사치코의 따뜻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텟페이 군?”
길게 계속되는 통화음에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연인의 목소리가 통화음을 대신했다.
“선배, 아침 일찍 죄송함다. 그, 나쁜 꿈을 꿔서요. 그래서.”
“텟페이 군도?”
기대하던 따뜻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꿈에서 떨던 사치코가, 전화 너머로 겹쳐졌다.
“혹시, 있잖아. 아무도 날 모르는…… 그런 꿈이었어?”
말문이 막혔다. 잠시 이조차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 네.”
“그렇구나. 똑같은 꿈을, 꾼 거네.”
꿈에서처럼, 불안한 목소리가 애써 침착을 가장했다. 사치코는 언제나 선배 역할을 자처했다. 이런 때마저 완전히 의지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어제의 게임 말임다. 테이블 어쩌고 하는 거.”
“TRPG?”
“네, 그거요. 너무 몰입했었나 봄다.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그 캐릭터가 선배한테 돌아갔잖슴까.”
그 역할이 사치코에게 돌아간 건 우연이었다. 게임을 가져온 츠바사에게 따질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러게. 이상한 꿈을 꿔 버렸네, 우리 둘 다.”
“다음엔 뒷맛 안 좋은 건 빼 달라고 해야겠슴다. 츠바사 선배가 또 뭔가 가져오실진 모르겠지만요.”
“응. 고마워, 텟페이 군. 전화도, 사실 먼저 하려다가 무서워서 관뒀거든.”
생생한 꿈이었다.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당장 손을 잡아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선배, 지금 집이신 거죠?”
“응.”
“그럼 다행임다. 밖에 나와도 안 사라질 검다. 다들 선배한테 평소처럼 인사해 줄 거고요.”
“텟페이 군…….”
추억은 전부 남아 있었다. 설령 어딘가에 사치코가 존재하지 않는, 똑같은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는 아니었다.
“맞아, 아침부터 텟페이 군 목소리도 들었으니까. 얼른 잊어버려야지.”
“그검다. 이런 꿈은 빨리 잊는 게 낫슴다. 좋은 아침임다, 선배.”
좋아하는 당신의 오늘이 좋은 아침으로 시작되도록. 언젠가 지금처럼 아침에 통화를 한 날이 있었다. 그때는 사치코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먼저 인사해 줘서 고마워, 텟페이 군. 좋은 아침이야.”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연인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