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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후반부의 결정적인 반전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됩니다. 스포일러 주의해 주세요.

* 욕설이 다수 등장하며 정신착란 증상에 대한 묘사가 전반적으로 깔려있습니다.

 

 

 

00.

 

곁에 있어줘.

미워해도 좋아. 질색해도 돼. 언젠가 내가 그러했듯이 똑같이 목을 졸라도 돼. ‘너라도 도망쳐’ 라는 말은 거짓말이야. 긁고 찢고 때려도 좋으니까 여기에서 나가지 마. 어디에도 외면당한 나를 내버려 두지 마.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말해도, 그 싫은 녀석이 불쌍해서라도 남아주면 괜찮아. 여기에 날 혼자 내버려 두지 마. 전부 죽여 버릴 거야. 구해달라고 하지도 않았잖아. 그냥 좀 같이 있어줘. 다 죽어버리라고 그래. 괜찮다고 해줘. 괜찮지 않은 건 알고 있으니까 거짓말이라도 해줘. 죽어버려. 죽어. 역시 죽어. 구해줘. 나를 사랑해서 여기 앉아있는 거잖아. 구해줘. 꺼내줘. 그러겠다고 했잖아. 담운. 담운. 도와줘. 사랑해. 네가 아니면 안 돼. 죽어. 꺼내줘. 날 내버려두지 마. 책임져줘. 내게 희망을 심은 책임을 져. 날 내버려두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곁에,

있어,

 

줘.

 

01.

 

“왜 그랬어?”

 

…어이. 그걸 네가 물으면 안 되는 거지. 그것보다 네가 왜 내 눈앞에 있는 건데? ‘너’는 내가 아닐 뿐 더러, 이렇게 꿈에 나타날 정도로 우리가 친했던가? 남의 수면을 방해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원시천존 그 영감이 안 가르쳐주던?

 

“그 녀석한테 왜 그랬어?”

“누구?”

“그 녀석 말이야.”

“이름으로 지칭해보지 그래. 아니면, 직접 부르기엔 양심이 찔리기라도 하나? 찔리겠지. 애초에 그 녀석 목에 손자국은 네 녀석이 낸 거잖아? 나는 목은 안 조르거든.”

 

뭐야. 뭘 그렇게 봐?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대답해 보라고. ‘왕혁’

 

“타인처럼 말하지 마.”

“…….”

“내가 한 일이고, 네가 한 일이잖아.”

“닥쳐.”

 

너는 내가 아냐. 나는 더 이상 그 때로 돌아갈 수 없어. 비린 걸 못 먹는 몸도 아니고, 그 이름도 이제는 쓰지 않아. 그 녀석이랑 꽃밭에서 뛰놀던 기억이 너무 좋아서 머릿속도 꽃밭이 되셨나? 그래서 잊어버린 거라면 이해해 주지.

 

“그 녀석에게 너무 그러지 마.”

“네가 할 말이냐? 그게?”

“지금은 밖에 나왔잖아.”

“그래. 결국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못하고 네 녀석이 미쳐 발작하는 꼴이나 받아주다가 달기 손에 같이 끌려나왔지. 그 상황에서도 그 녀석은 끝까지 네 이름만 부르고, 나는.”

“너도 ‘혁이’잖아.”

 

듣자듣자 하니까, 이 새끼가!

 

“닥쳐.”

 

네가 뭘 알아. 젠장. 나는 네가 아냐. 인간 도사 왕혁은, 그날 봉인뢰 안에서 뒈졌다고. 나는 그렇게 불릴 이유가 없어. 그 녀석이 내 옆에 있는 것도 결국 네 놈이 부탁해서일 뿐, 그 눈이 보는 건 내가 아니라,

 

“아닌 걸 알잖아.”

“닥치라고!”

 

그 녀석이 조르지 못한 목, 내가 대신 졸라주지. 물론 이 꼴을 그 녀석이 본다면 그만 두라며 뜯어말리겠지만, 알 게 뭐야. 잠 정도는 좀 편하게 자고 싶은데, 여기까지 와서 날 들쑤시고. 이미 내게서 저 멀리 떠난 것들인데. 아무리 용을 써도 돌아오지도 않는데. 이제 그 녀석은 두 번 다시 그렇게 웃어주지 않을 텐데. 기만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애새끼가!

 

“크, ㅅ….”

“닥쳐. 닥쳐. 닥쳐….”

 

네가 나에게 책임을 물으면,

나는 누구를 원망하라는 거야.

 

“…….”

“…하…. 젠장.”

 

이래서 인간이란. 힘을 좀 세게 주긴 했지만, 벌써 조용해 질 필요까지 있나. 물론 더 떠들었으면 진짜 목을 꺾어 버렸겠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젠장. 겨우 조용해졌나 했더니. 기어이 목을 꺾어줘야 닥칠 셈인가.

 

“나는 너고, 그 녀석을 그렇게 만든 건 우리야.”

 

입 다물어. 그건 네 녀석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겠지. 나는 아무 잘못 없어. 나쁜 건 나를 버린 영감과, 봉인뢰에 처넣고 살피지도 않은 교주 놈이랑, 이용해 먹으려고 요괴까지 풀어 판을 만든 후 다가온 달기와, 문중의 손도 잡지 않고 내 곁에 남은 그 녀석이지.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야. 그 녀석을 그렇게 만든 건,

 

“너잖아.”

 

그러니까 죽어.

봉인뢰에서 이미 한 번 죽었으니, 여기서 한 번 더 죽는 다고 바뀌는 것도 없을 테니까.

한 번 더 죽어버려. 왕혁.

 

 

02.

 

“왜 그랬어?”

 

아아. 이게 누구야. 얼마 전 다른 놈의 꿈에 나왔다고 들었는데. 내 꿈에도 올 필요가 있나? 자세한 건 모르지만, 목이 꺾인 걸로 아는데. 직접 보니 멀쩡해 보이잖아. 역시 꿈이라서 그런가? 편하고 좋네. 난 너 말고 그 녀석이 꿈에 좀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안아본지 오래 되어서, 여기서라도 안아보고 싶었거든.

 

“보고 싶어?”

“그건 왜? 궁금할 이유가 있나?”

“그냥 묻는 거야.”

“만났을 때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나도 모르겠지만, 보고는 싶네. 달기 명령만 기다리며 숨어있자니 따분하거든.”

 

불쌍하게도 말이지. 누구는 금오도에 눌러 붙어 앉아 재미도 보고 대장질도 해먹는데 난 이러고 있고. 애초에 하나였던 혼을 반으로 쪼개고, 그걸 또 셋으로 쪼갰으니 그놈이 그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육체라는 건 다른 문제잖아? 당장 너만 해도 그렇지. 나는 네 3분의 1이지만. 난 요괴고 넌 인간이지.

 

“그래도 너는 나야. 나도 너고.”

“잘 아네. 그럼 이참에 말해두지. 지금 담운의 상황에 대해 누구에게든 책임을 물으려는 모양인데, 너도 곧 이렇게 될 테니 그냥 포기하는 게 낫지 않나? 애초에 나는 그 녀석이랑 별로 붙어있지도 않은데 왜 와서 책임을 묻는 거지? 다시 ‘금오도에 있는 나’에게 가지 그래? 아니면 세 번째에게 가던가.”

 

왜 대답이 없나? 맞는 말이라서 반박이 잘 떠오르지 않기라도? 더 이상 지껄일 말이 없다면 꺼지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웃고 있긴 하지만 지금 기분이 좋은 건 아니거든.

 

“왜 미워하는 거야?”

“미운 녀석밖에 없는 세상이라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군.”

“그 녀석은, 이런 너라도 미워하지 않는데.”

“지은 죄가 있으니까. 나를 구해주지도 않았으면서, 본인은 아직 제정신이잖아?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본인도 망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으면서 곁에서 버티는 건 미련한 짓이지. 결국 날 꺼내준 건 달기였어. 이용해먹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그 이용가치조차 없었으면 누가 날 꺼내주려고 했겠나? 물론 날 두고 갔다면 죽여 버렸겠지만. 그래도 본인 혼자 멀쩡하고, 문중 놈이랑도 잘 지내고, 결국 잃은 것 하나 없이 내 곁에 남아서 뭐든 하겠다고 해봐야 웃길 뿐이야.

 

“담운은 이미 망가졌어.”

“제정신이잖아? 무서울 정도로. 하여간 독한 여자야. 내가 산채로 씹어 먹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안 망가질걸.”

“그러지 마.”

“왜. 부럽나? 괜찮아, 난 너고 네 일부는 내가 될 테니까. 그 때는 알게 될 거야. 이 엿 같은 상황에서도 쾌락은 존재한다는 걸.”

“좋아하잖아.”

“그건 ‘너’의 감정이고.”

 

나는 이제 그 녀석이 싫어. 아주 질색인 건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옛날 생각이 나서 기분이 더러워져. 망가뜨리고, 울리고, 나를 내버려 둔 책임을 묻고 싶어진다고. 그래도 그 녀석은 여전히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 내가 아무리 개같이 굴어도 미안하다는 말 외엔 하지를 않지. 몸과 영혼을 다 바쳐 속죄한다! 아주 대견해. 공주도 참 제자를 잘 가르쳐 놨어.

 

“자. 이야기는 끝이야. 뒈지고 싶지 않으면 꺼져. 아니면 그 녀석 좀 데리고 와. 네가 울면서 ‘곁에 있어줘’라고 하면 헐레벌떡 달려올 거 아냐?”

“…….”

 

착하기도 하지. 가라고 하니 정말 가고.

…….

그래. 얼른 꺼져버려. 그 녀석 곁으로. 가서, 실컷 어리광 부리고 끌어안으라고.

‘곁에 있어줘.’ 라고,

부질없는 애원을 지껄이면서 말이야.

 

 

03.

 

“왜 그랬어?”

 

하아….

이 타이밍에 나오는 건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 말고 나머지 둘은 봉신대에 처박혀 있어서 이쪽으로 온 모양인데, 이왕 올 거라면 좀 더 일찍 오지 그랬나. 왕혁. 나는 이제 지쳤어. 악몽에 일일이 화낼 기력도 없다고. 자기파괴뿐일 심문은 거절하고 싶은데.

 

“지쳤지?”

 

그래. 지쳤어. 지쳤다마다. 이제 봉신계획도 거의 끝이지만 나도 한계야. 평생을 찾아온 반쪽…, 그러니까, ‘왕혁’ 상태에서 반으로 쪼개졌던 영혼 말이야, ‘왕천군’이 아닌, 너의 반쪽. 어쨌든, 그게 누군지도 알아냈으니 내 할 일은 끝이야. 이제 남은 건 그 반쪽─ 태공망과 접촉해 하나로 돌아간 후 이 빌어먹을 계획을 완수하는 것뿐이지.

 

“담운은?”

“아직은 살아있어.”

“가망은 없는 거야?”

“없어. 달기도 그렇게 말했고,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니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다고 할까. 사실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건 나였지. 그래. 내가 죽였다고 해도 좋겠군. 왜 그랬냐고? 그래야만 했으니까. 계획을 위해선 저질러야 하지만, 태공망은 하지 못하는 일. 그런 잔인하고 지저분한 일을 해야 하는 게 내 역할이니까.

나의 일에는 조력자가 필요했고, 그 녀석은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몸이었어. 그래서 이용했고, 죽게 내버려두고 있을 뿐이다. 기분은 더럽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그 빌어 처먹을 계획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어. 자. 이 이상 대답이 필요하나?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안 되겠지. 내가 다시 왕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네가 되지는 못할 거다. 무엇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나? 나는 네가 될 수 없어. 그리고 그 녀석…, 담운과도 다시 그렇게 지낼 순 없을 거다.”

“돌아갈 순 없어도,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하.”

 

역시 쉽게 말하는 군. 남의 일처럼 말이지. 내가 이제 와서 그 녀석에게 뭐라고 할 수 있지? 자길 죽음으로 떠민 남자를 욕하기는커녕, 이제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그 바보에게? 그 녀석이 날 동정하든 사랑하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녀석에겐 내가 없는 게 행복일 테니까. 나는 그 녀석밖에 없지만…, 그 녀석을 사랑하는 이들은 두 손 가득 꼽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모든 걸 버리고 와서, 결국 네 품속에서 죽어가고 있잖아.”

“…….”

 

젠장. 너무 지쳐서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군. 대단한 악몽이야. 박수라도 쳐주고 싶어.

…그래. 내가졌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말했고, 후회도 안 하는데다가, 변명할 생각도 없으니 꺼져. 죽어가고 있지 않은 그 녀석에게로 돌아가. 살아있을 때 실컷 사랑하라고. 네 손으로 죽여 버릴 유일한 네 편을, 열심히 아끼고 보듬도록 해. 나는, 이제 더 이상,

 

“혁아.”

 

…허?

 

“괜찮아?”

 

잠깐. 네가 왜 여기 있어? 게다가, 그 모습으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왕혁’이랑 같이 꺼져. 나한테 오지 마. 나는, 널.

 

“나는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꺼져.”

“다 내 선택이었어. 네 잘못이 아냐.”

“젠장. 내가 꿈에서도 이 소릴 들어야겠냐? 뭘 선택했는데, 네가? 뭘?”

“네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선택지.”

 

아아, 하여간. 꿈속에서나 꿈 밖에서나, 이 녀석은 흔들림이라곤 없다.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잡아주고, 가여워하고, 상냥함을 건네어서.

 

“사랑해.”

“담운.”

“사랑해. 혁아.”

 

잠깐. 입 맞추지 마. 젠장. 젠장. 젠장. 그렇게 엉겨 붙지 마. 제발. 담운. 꺼져. 사라져.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지 마. 차라리 미워하고 원망하고 질색해. 내 마음을 이딴 식으로 끄집어내려 하지 마.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냐. 네 마음도 내 마음도 전부 비참하게 만들지 마. 그만. 그만. 제기랄. 그만 둬. 그만…!

 

“안 돼.”

 

아.

 

“이건 악몽이니까. 여기서 끝날 리가 없잖아?”

 

아아,

그래. 그랬지.

이건 악몽이었고, 너도 내 꿈이었지.

 

…….

 

그래. 좋아. 어디 마음대로 해. 담운. 꿈 밖에 있는 진짜 너는 나에게 아무 짓도 못하니까. 어디 실컷 괴롭혀 보라고.

 

…그래야 나도 마음이 편할 테니까.

Editten By ITE(@Uruwashii_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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